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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추 Mar 08. 2021

목련꽃 활짝 핀 골목

좁고 투박한 골목 한가운데 큰 목련 나무 한 그루가 봄이면 그 거대한 존재를 뽐내며 봄이 왔음을 알린다. 근 3년간 출퇴근 길과 점심시간을 합쳐 하루에 총 2번을 왕복하며 다니던 골목이다. 이 동네에 30년을 넘게 살았어도 이 길을 지나다닐 일이 초등학생 때 이후로는 거의 없었는데, 운이 좋게 이 골목에서 마지막 3년간의 봄을 볼 수 있었다. 추위가 좀 가실 즘 목련나무 가지 끝에서 연둣빛의 노란 봉우리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한다. 작은 봉오리가 팝콘처럼 어찌나 빨리 퍼지는지 며칠 사이에 나무 전체에 탐스러운 꽃봉오리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성질 급한 봉오리 몇몇은 벌써 꽃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오늘 룽지랑 산책은 이쪽으로 와야지.’

출근길에 오늘 산책코스까지 정해 놓고 나니 퇴근이 평소보다 더 기다려진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가는 길엔 높이 올라가 있는 해의 기운을 받아 이 골목의 따사로움이 배가 된다. 목련 나무의 그림자가 바닥을 타고서 옆집까지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놓으니 꼬르륵 소리를 내는 내 배는 무시해도 괜찮다. 빛과 그림자가 이 골목에 부여하는 까슬까슬하고 따듯한 느낌이 너무 좋다.


점심을 다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몇몇 꽃 흉내를 내던 봉오리들이 금세 활짝 피어나 있는 걸 보게 된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렇게 빨리도 피어나는지 며칠 뒤면 후두두 떨어질 생각에 아쉬움이 한가득이다.

‘퇴근하고 보면 다 떨어져 있는 거 아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룽지가 이 활짝 핀 꽃들을 보지 못할까 봐 걱정을 안고 회사로 돌아간다. 사실 룽지는 목련꽃에 관심이 없을 확률이 더 큰데, 나만 호들갑이다. 아닌가? 개들도 꽃을 보면 좋아하려나? 모르겠다. 그래도 보여주고 싶은걸?!


오후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목련 나무를 다시 마주한다. 괜히 꽃잎이 한두 개 떨어져 있으면 가슴이 철렁한다. 이 따듯한 봄이 저 꽃잎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달까? 평소보다 발걸음을 더 재촉해서 집으로 간다. 룽지는 내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내가 온 걸 알고 골목을 올라갈 때부터 짖기 시작한다. 혹은 열쇠 꺼내는 소리로도 내가 온 걸 안다. 일부러 골목 끝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열쇠를 꺼내봐도 알아채는 걸 보면 무서울 정도다. 궁둥이를 사방으로 흔들어대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룽지에게 ‘산책 갈까?’라고 말하면 뒤로 넘어가 있던 두 귀가 쫑긋 솟구치며 여우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물개가 여우가 되는 순간이다.


재빨리 하네스를 채우고 집 밖으로 나와서 평소 가던 산책코스와 다른 길로 방향을 잡으니 룽지가 갸우뚱거린다. 어떻게 매번 가는 길은 귀신같이 아는지, 오늘은 해가 지기 전에 빨리 봐야 할 것이 있다고 겨우 설득해서 다른 길로 간다. (고집이 세서 궁둥이를 통통 쳐줘야 방향을 바꾼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개다) 룽지는 골목의 냄새들이 너무 향긋한지(얼마나 구린지) 가다 멈추고, 냄새 맡고, 마킹하고를 반복하느라 혼자 걸어가면 5분도 안 걸릴 거리를 10분째 내려가고 있다.


‘짜잔-! 룽지야 저것 좀 봐봐. 너무 이쁘지?’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건지 연신 코를 바닥에 처박고 냄새만 맡고 있다. 그래, 개들은 코가 눈과 같다 했으니 나름대로 보고는 있는 거겠지?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저 나무의 꽃을 목격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본능에 충실해 오줌만 싸 대는 룽지와 그래도 이 감상을 나눠보겠다며 계속 말을 거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각자의 본능에 충실한 우리 둘은 서로의 방식대로 이 목련나무의 마지막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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