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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추 Mar 02. 2021

벽돌집 사이 길고양이 가족

산성동에는 3세대에 걸쳐 한 곳에서 나고 자라는 길고양이들이 있다. 벽돌집 사이 1m 남짓의 좁은 통로가 이 길고양이 가족이 사는 곳이다. 좁고 아늑한 공간에 주민들이 비를 맞지 말라고 나무판자로 지붕까지 만들어주니 길고양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 되었다. 따듯한 봄에 1세대 어미 고양이가 이곳에서 새끼를 낳았고, 햇볕 좋은 날 아기 고양이들이 바닥에서 꿈틀꿈틀 놀고 있으니 동네 주민들이 출근길에 발이 잡혀 반강제적으로 지각을 면치 못했다. 나도 지각을 예약한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시간에 여유가 있는 주말이면 사료들을 사다 주곤 했다. 그럴 때면 다섯 꼬물이 중 유독 호기심이 많고 겁이 적은 한 아이가 다가와서 앞발로 내 발을 톡톡 건드리고 후다닥 도망간다. 내가 가져온 사료에 대한 감사의 인사인 걸까? 이 고양이는 길고양이 치고 경계심이 적고 사람을 잘 따라서 먹을 것을 손으로 줘도 곧잘 와서 받아먹었다. 다른 아이들은 손으로 직접 주는 사료는커녕 내가 멀리 떨어질 때까지 절대 사료를 먹지 않았다. 결국 오래 살아남는 아이들은 이렇게 사람에 대한 경계가 적은 고양이들이었다. 문득 소름이 끼친다. 인간이 고양이의 진화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 든다. 인간 친화적인 아이들만 살아남게 만드는 인간 중심의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건가? 결국 내 발을 톡톡 치고, 손으로 주는 사료도 곧잘 받아먹던 아이가 자라서 벽돌집 사이의 2세대 어미가 되었다.


어느 날 룽지랑 이 골목을 지나가는데 어디서 많이 본 길고양이가 벽돌집 사이 문 앞에 앉아있었다. 바로 내 발을 건드렸던 그 고양이였다. 얼굴의 무늬가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콧대를 따라 무늬가 있어서 ‘이 고양이 콧대 높네.’라고 생각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룽지를 보고는 경계의 눈빛을 보내면서 ‘캬악-‘ 거리는데 뒤 문틈 아래에서 꼬물거리며 머리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이 콧대 높은 고양이의 새끼였다. 이 3세대 새끼 고양이들도 2세대 새끼 고양이들처럼 볕 좋은 날이면 길바닥에 드러누워 여유를 즐겼다. 동네 주민들이 먹을 것들을 잘 챙겨주시는지 새끼 고양이들은 길에서 자란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토실토실해졌다. 반면에 어미 고양이는 점점 말라 가는 것 같았다. 먹을 것을 갖다 줘도 항상 새끼들이 다 먹을 때까지 먹지 않았다. 내 발을 톡톡 치던 작고 호기심 많던 모습은 사라지고 듬직한 어미의 모습을 갖춘 이 아이를 보니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래도 이 콧대 높은 고양이 옆에는 항상 새까만 고양이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 (너무 새까매서 밤에는 이 아이가 눈을 뜨고 있어야 거기 있는 줄 안다) 너무 경계심이 많아서 문 뒤나 차 밑에서 잘 나오진 않았지만, 1세대 어미처럼 혼자가 아니라 그래도 믿고 의지할 친구가 있으니 서로 힘이 되고 좋지 않을까? 육아도 분담하고?!


3세대 아이 중에 가장 덩치가 크고 유독 미모가 눈에 띄는 고양이가 있는데, 회색 턱시도를 입고 있는 고양이이다. 이 아이도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적은 편이라 들고 있던 끈을 장난감 삼아 흔들어주면 얼굴을 휙휙 돌리며 손으로 낚아챌 준비를 한다. 고양이들이 그렇게도 좋아한다는 츄르를 가져가 손으로 짜주면 유일하게 내 앞에 앉아서 츄르를 받아먹는 아이이다. 어미를 꼭 닮은 이 아이를 보니 이곳의 다음 주인이 보이는 듯했다.


이 골목을 매일 지나다녀도 항상 이 고양이 가족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 가족을 만나는 날이면 꼭 주변 슈퍼에 가서 캔 사료를 사다 주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손바닥만 했던 새끼들이 두 배로 커져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봄이 찾아왔을 때 이 벽돌집 사이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회색 턱시도를 입고 있는 고양이였다. 다른 형제들은 사라지고 혼자 남아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디 간 걸까? 단순히 성묘가 되어 각자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난 것일까? 아니면 자연도태된 것일까? 그래도 우리 동네엔 길고양이들을 챙겨주는 분들이 많으니 새로운 곳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산성동의 다른 골목에서 ‘콧대 높은 고양이'를 만나기도 했다. 서열에서 밀려나 그곳으로 이주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서 건강하게 잘살고 있으니 됐다. (고양이들은 부모라도 서열에서 밀리면 예외 없이 거주지에서 내쫓아버리나?) 다만 한 가지 맘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이제 곧 산성동이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는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이동하는 간단한 이주가 아니라 큰 도로를 건너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 될 텐데, 산성동에 사는 길고양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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