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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추 Feb 26. 2021

구름다리를 건너 산책길을 따라


산책은 항상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입구에 ‘단대공원’이라고 쓰여있는 큰 돌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놀이터가 보인다. 거기서 좀 더 올라가면 이 구름다리를 볼 수 있다. 주로 퇴근하고 어두운 시간에 산책을 나올 때가 많았는데, 유독 밝게 빛나고 있는 이 다리 위의 가로등이 참 고마웠다.


요즘 이 다리 위에서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어딘가 애잔한 마음이 든다. 얼마 전 준공을 한 대형 아파트 단지가 뒤에 병풍처럼 서있어서 그런 걸까? 그 거대한 풍채에 밀려 이 작은 동네가 왠지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깨가 있다면 톡톡 쳐주면서 ‘너도 곧 저렇게 될 거니까 자신감 가져’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동네에는 어깨라고 나눠서 말할 부분이 없거니와 사실 나도 이런 말을 하는 게 그렇게 내키진 않는다. 내가 평생을 살아온 동네가 곧 재개발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데 그게 마치 이 곳에 크나큰 축복인 것처럼 응원의 말을 해주고 싶진 않다. (사실 자본주의의 논리로 보면 이 동네(집주인들)에 엄청난 행운인 건 맞지만, 내 자본은 아니니까 이 정도 시샘은 부려도 되겠지!) 그래서 요즘엔 룽지와 산책을 다니면서 보이는 풍경들에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별수 있나.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갈 테고, 얼마 남지 않은 그 시간만이라도 룽지랑 더 열심히 돌아다니며 나의 동네를 눈과 마음에 차곡차곡 담아두는 수밖에.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도 룽지를 만나기 전엔 단대 공원의 산책길을 걸은 적이 거의 없다. 동네에 이렇게 좋은 산책 코스가 있는데,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조깅트랙만 한 시간씩 걷곤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혼자 어두운 산속을 걷는 것이 무서웠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룽지랑 걷는 이 산속은 무섭지 않았다. 이 작은 생명체에게 내가 꽤 의지하고 있나 보다.


개들은 함께하는 주인을 닮아 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래서 룽지는 성격이 참 급하다. 가늘고 짧은 다리가 얼마나 바쁘게도 움직이는지. 이 산책길의 냄새를 반드시 오늘 다 맡고 돌아가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나온 건가 싶을 정도로 발이 정신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산책을 나온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우리는 구름다리를 건너 암석원까지 와있다. 암석원은 말 그대로 큰 돌들이 산책길을 따라 양 옆으로 전시되어 있는 공원이다. 비가 그친 후 촉촉한 공기를 머금고 있을 때 이 길을 걸으면 정말 좋다. 다리가 짧은 룽지는 비가 그치고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산책하면 배가 다 젖어서 엉망이 된다. 하지만 이때는 꼭 산책을 해야 한다. 특히 해가 지는 시간에는 무조건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넘어가는 해의 빛이 들어올 때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서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햇살을 빤짝이게 만든다. 이 풍경을 보고 있으면 고요하고 평화롭다. 따사로운 빛과 상쾌한 공기, 비 냄새까지 모든 게 완벽한 순간이다.


이 산책길의 정상에는 넓은 공터와 정자가 있다. 예전에는 이 공터에서 무료 택견 수업도 했었다.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이 공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무들이 빼곡해서 전망이 잘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나무들 사이로 산성동의 귀여운 집들이 얼핏 얼핏 보인다. 뒤쪽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후로 이 동네의 집들이 더 깜찍해 보이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옥상 바닥 색들이 마치 색동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 같다. 룽지는 내가 이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이 부근에서 항상 똥을 싼다. 그래서 정자 옆의 쓰레기통은 룽지의 똥 봉투를 책임지고 있다. 룽지의 첫 번째 배변을 무사히 마치고 더 걸어가다 보면 산길이 끝나면서 앞서 말한 동그란 조깅트랙이 나온다. 최근에 리모델링 공사를 해서 한결 깔끔해진 상태이다. 이곳에는 귀여운 토끼들이 산다. 동네 주민분들이 배추 같은 것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시니 반야생 토끼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토끼 두 마리가 이 공원에 나타났는데, 아직 어려 보여서 누가 키우다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어린 토끼들이 야생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걱정했었는데, 이게 웬걸. 토끼들의 번식력이 좋다는 말을 이 아이들을 보면서 이해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못 보던 토끼들이 나타나고 그렇게 이 공원에서 토끼들의 세대교체가 계속되고 있다.


토끼들의 주거지가 된 이 조깅트랙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면 반려견 놀이터가 있다. 룽지와 나의 최종 목적지이다. 우리 동네에 이토록 개들이 많다는 걸 이 놀이터가 생기고 알았다. 주말에 이곳에 가면 개들로 바글바글하다. 분명한 건 사람보다 개가 더 많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반려견 놀이터의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데 놀이터를 빙 둘러싼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아주 아름답게 물이 든다. 노랗고 빨간 잎들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룽지는 은행과 단풍보다는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걸 좋아한다. 특히 공을 쫓아가거나 빠르게 달리는 친구들을 쫓아가는 걸 매우 좋아한다. 소를 몰던 목양견의 본성이 남아 있는 것일까? 사냥하듯이 개들을 몰아가는 걸 좋아하는데, 작은 개들은 절대 몰지 않는다. 큰 개만 앙칼지게 짖어대면서 쫓아간다. (소처럼 덩치가 커야 몰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럴 때면 혹시라도 견주나 개가 룽지의 놀자는 의도를 오해하고 싫어할까 봐 노심초사한다. 한 번은 놀자고 짖는 (분명 놀자고 짖는 소리였다. 소리가 확실히 다르다) 소리를 듣고 래브라도 레트리버가 짖으면서 화낸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룽지가 짖으면서 쫓아오는 게 싫었을 것이다. 이 이후로는 혹시나 싸움이 나서 다칠까 봐 아무도 없을 때 아니면 리드 줄을 풀어놓지 않는다. 무엇보다 몰이 놀이를 하면서 덩치 큰 허스키를 쫓아가다 뒷다리 십자인대가 부분 파열된 후로는 아예 이 놀이를 금지시켰다.


원래 이 반려견 놀이터가 있던 이 자리에는 한성정이라는 이름의 국궁장이 있었다. 세네 살쯤 이곳에 공주 드레스를 입고 와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있다. 룽지와 산책을 다니기 전까지는 이 곳에 올 일이 없어서 국궁장이 폐쇄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목줄 없이 뛰어놀 수 있는 곳을 찾다가 한성정까지 가게 되었고, 그곳에 있는 풋살장을 보게 된 것이다. 풋살장은 문을 잠가 놓을 수 있어서 룽지랑 뛰어 놀기에 좋았다. 우리는 둘만의 아지트처럼 매일 이곳을 찾아왔다. 반려견 놀이터가 생긴 후로는 만인의 아지트가 되었지만, 이 동네를 생각하면 이곳에서 룽지와 자유롭게 뛰어놀던 때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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