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210927)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상금 1억원을 걸었다. 만약 1억이라는 숫자를 1년 동안 모두 세어서 녹음을 해서 오면(모든 숫자를 안 빼먹고 센다는 조건으로) 약속한 상금을 주시겠다고 공언했다. 얼핏 가능할 것 같지만 불가능하다. 물론, 불가능하니까 주신다고 했겠지만.
당시에 1억원은 어느 정도의 돈이었을까? 1995년 국내 선수로는 최초로 선동렬이 1억 5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당시 연봉 1억원은 최고의 선수를 의미했다. 그 당시에 평균 연봉은 천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평균 연봉은 열 배 정도 올랐고, 최고 연봉은 20배 이상 올랐다(2021년 기준 추신수가 27억원으로 최고이다).
50억원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를 설명하다보니 사족이 길어졌다. 월급장이라면 50억원이라는 돈이 정상적인 저축으로는 절대 모을 수 없는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5000억원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더 나아가, 좀 극단적이지만, 목숨을 걸만한 돈의 액수는 어느 정도일까.
내가 이걸 고민했던 이유는 소설을 쓰다가 범죄의 동기가 될 만한 돈의 액수를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얼마로 정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아서 대충 정했다. 나중에 '돈'을 중심으로 소설을 읽다보니 소설가들 사이에, 비록 둘 다 미국 작가들이었지만, 암묵적인 합의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심플 플랜>에서는 440만불(50억원정도)이 든 돈가방을 발견한 세 사람의 심플했지만 끔찍해져가는 계획을 보여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200만불이 든 돈가방을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쫓긴다. 소설 속에서는 대략 15-20억원 정도가 되면 목숨을 거는 것 같다. 애석하게도 내 소설에서는 훨씬 작은 액수였다. 그래서 판매 성적이 부진한 건가? 어차피 픽션인데 그냥 세게 지를걸.
사족이 조금 더 길어졌지만 결국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최고의 선수도 아니고 목숨을 걸지도 않은 평범한 회사원이 성과급으로 받은 50억원(원천징수후 28억원)을 "내 몸 상해 번 돈"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50억원은 소설 속에서나마 목숨을 거는 이들이 존재하지만 5000억원은 그마저도 희박하다. 일상적인 경험 밖의 액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이콥과 행크와 루가 목숨을 걸었던 돈의 100배에, 사이코패스 시거에게 쫓기는 모스가 목숨을 걸었던 돈의 250배에 해당하는 돈이다. 참고로 5천억은 5천 년 동안 세도 셀 수 없는 숫자이다.
목숨값의 몇 백배에 해당하는 돈 5000억원은 대체 누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