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210927, 28)
작년 6월 즈음이었다. 그만두는 직원이 있어서 일이 끝나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근처에서 삼겹살이나 먹으려고 했는데 식당을 찾다보니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다. 근처의 식당들이 줄줄이 문을 닫은 것이다. 다섯 군데가 문을 닫았고 결국 여섯번째 집에서 먹었다. 식당 이름이 <뻥가네> 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그게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였으니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난 지금 자영업자들의 사정이 어떨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K-방역이란 미명 아래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생활을 침해 당하고, 통제 당하는데 아주 익숙해졌다. 부모님은 유럽이나 미국은 말이 선진국이지 이거 하나 제대로 못한다며 K-방역의 철저한 통제를 자랑스러워했다. 어제 신문을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푸코의 책이 떠올랐다. 십 년 전에 논문을 쓸 일이 있어서 푸코의 책을 몇 권 읽은 적이 있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프랑스 임상의학이 어떤 식으로 발생했는 지를 추적했다. 그가 추적하고 있는 것은 의학과 권력의 관계이기도 하고 의학내부에서 변화하는 철학적 시선이었다. '분류하기' 의학에서 출발한 의학은 전염병의 시대와 혁명의 시대를 거쳐서 국가 권력과 연결되고 의료는 더이상 순순한 시혜가 아닌 관리와 통제의 기능을 갖게 된다. 의과대학과 왕립의학협회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었던 것이다.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고대의 권력이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었다면 근대의 권력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 되었다고 한다(<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권력이 된 의학? 당시에 책을 읽을 때는 의학이 또는 의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그런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나 하는 생각을 했다. 편집증 또는 과대망상 아닌가.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사회를 보면서 푸코의 생각에 동의하게 됐다. K-방역이란 게 결국 누군가를 살린다(faire vivre)는 미명아래 누군가가 희생되도록 방치하는(lasser mourir) 하고 있는 거니까.
내가 한 가지 잘못 알았던 게 있다면, 의학이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의학을 장악하게 됐다는 것. 과학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은 방역으로 언제까지 버틸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