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의 변화 Mar 18. 2023

예감(1, 2)

개원했습니다. 

예감


누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두 달 만에 ADHD를 진단받았다. 약을 먹은 후로 누리는 오전에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오후가 되면 지나치게 활발해졌다. 약효가 오전에는 강하지만 오후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누리의 학교생활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이 지내다가 학교가 끝나면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랬지만 누리가 친구를 집으로 데려온 적도 친구와 놀았다는 얘기를 한 적도 없었다. 아침이 되면 그림자처럼 학교에 가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쌩하니 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초등 5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누리는 거실에 있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마우스를 이용해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거의 두 달 가까이 에어컨도 틀어놓지 않은 거실에서 매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작업을 했다. 


“이거 USB에 저장하려면 어떻게 해?”


누리가 켜놓은 노트북 화면에는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악당 조커처럼 입꼬리가 위로 길게 찢어진 채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괴물을 향해 다가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를 막아서고 있는 방패연처럼 네모난 괴물은 거대한 잠자리 모양의 또 다른 괴물의 대가리 위에 놓여 있었고 붉은 발톱과 가시로 덮인 녹색 다리가 거미줄처럼 드리워져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USB에 저장하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누리가 두 달 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우연히 보게 됐다. 부서진 안드로이드, 붉은 등(燈)이 떠다니는 어두컴컴한 밤을 배회하는 알록달록한 유령,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할 것 같은 기괴한 형태의 괴물, 모두 놀라웠지만 그림에서 풍기는 묘한 귀기(鬼氣)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다.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본 것일까. 


나는 예감을 믿는 편이다. 아니다, 예감이라는 단어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에피파니 같은 종교적인 자각(의 순간) 같은 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능력이 내게 있고 없고는 둘째 치고 그날 누리의 그림을 보면서 놀라움, 불안과 함께 에피파니 같은 걸 느꼈다. 비록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그 에피파니는 남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신이 누리에게 축복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평범한 내게는 안 보이지만) 누리가 보는 세상 속에서는 밤마다 알록달록한 유령들이 붉은 등을 길잡이 삼아 어두컴컴한 거리를 둥둥 떠다니고, 부서진 얼굴의 반쪽을 드러낸 안드로이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친구가 되고, 기괴한 형태의 괴물들이 개와 고양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동네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마치 고흐가 사이프러스 나무 너머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무리의 소용돌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던 것처럼 누리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식탁 위에 휴대용 티슈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무신경하게 넘겼는데 매번 같은 게 같은 위치에 있었다. 확인해 보니 누리가 하굣길에 받은 휴대용 티슈를 받아서 식탁 위에 놓은 것이었다. 애니학원 홍보용 판촉물이었다. 누리에게 물어보니 애니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누리가 집을 벗어나서 하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다는 게 기뻤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애니학원이 걸어서 가기에는 조금 먼 곳이었기 때문이다. 누리 혼자서 지하철을 타라고 하기에는 불안했다. 결국 고민 끝에 아내가 두 달 동안 누리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법을 여러 번 연습한 시킨 후에야 혼자서 다닐 수 있게 됐다. 누리가 혼자서 갔다 온 날 첫날 혼자서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난다.  

언제부턴가 나는 글을 쓰는 ‘나’와 환자를 보는 ‘나’가 분리돼 있다고 상상해왔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나처럼, 혹은 영화 <패터슨> 속의 버스 운전사 패터슨처럼 예술적인 열망과 일상적인 업무가 삶 속에 공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리도 그러기를 바랐다.  


얼핏 생각하면 하나 보다는 둘을 하는 게 힘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만 해야 할 때가 더 힘들었다. 내 인생에서 우울했던 시기는 한 가지 일(당연히 일상적인 업무)밖에 할 수 없을 때였다. 아마도 그건 어떤 소설가의 말처럼 한쪽의 스트레스를 다른 한쪽이 해소해주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예외도 있었다. 야구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 그 시절은 야구가 나의 아니 우리 가족의 유일한 열망이었다.       

“화상 환자 보는 게 응급실보다 더 적성에 맞으세요?” 황우영이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둘 다 힘들지 않나요? 중환자 안 봐도 되는 과들도 많잖아요.”

힘들고 안 힘들고를 떠나서 의과대학 들어올 때 상상했던 내 모습은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는 의사였다. 거기에 충실하고 싶었고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었다.  


형은 완전 외과 스타일인데, 외과의 민호는 가끔 형이 왜 응급의학과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하곤 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응급의학과를 지원할 때도 어떤 예감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 예감의 내용을 아주 단순화하면, 대형병원 응급실에 취직해서 월급 따박따박 받으면서 평생 한 직장에서 일하는 거였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응급의학과를 지원할 당시에 내 꿈은 거창하게도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를 꿈꾸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되는 거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응급 처치 외에 특별한 뭔가를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버렸다. 충전력이 고갈돼 가는 휴대폰 배터리처럼 아니면 조금씩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초처럼 당직을 서고 나면 조금씩 사그라져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대준의 연락을 받았을 당시에 나는 새로운 직장이 아닌 새로운 일이 필요했다. 직장을 옮겨봤자 하는 일이 똑같으면 어차피 마찬가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준이 제시한 일이 화상이었고 당시에는 모든 면에서 (응급의학과) 이탈자인 내게 ‘딱’이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과는 정반대였던 것 같다. 지금은 새로운 일이 아닌 새로운 직장이 필요한 상황이니.  

주위를 둘러봤지만 입구에서 발골작업을 하고 있는 사장님 외에는 주문받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잘린 늑골 단면과 하얀 지방이 붙어있는 붉은 살코기 덩어리가 갈고리로 천정의 철봉에 걸려 있었다. 초원식당 사장님은 입구에 경매로 사온 소를 걸어놓고 해체 중이었다. 도마 위에서 고기를 정리하던 사장님이 나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아직도 직원 못 구하셨어요?” 내가 정문에 붙어 있는 구인 광고를 보면서 물었다. 

네,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럽게 안 구해져요. 백반 안 하면 직원 한 명이면 되는데. 이십 년 동안 했는데 없앨까 봐요. 메뉴 고민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초원식당은 점심에는 백반을 저녁에는 고기구이를 팔았는데 소는 사장님이 직접 해체를 하기 때문에 가성비가 좋았다. 소를 해체하는 날에는 단골들을 불러서 구이용과 육사시미로 팔았다. 사장님의 고민은 구이용이 아닌 부위의 처리였는데 단품 메뉴인 설렁탕이나 육개장이 있었지만 많이 나가지 않았다. 결국 백반 메뉴를 통해서 국거리용으로 소모시킬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내가 초원식당의 단골이 된 건 그 무엇보다 백반 때문이었다. 여기가 아무리 서울이 아닌 용촌이라지만 칠천 원에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돼지갈비찜 육회비빔밥 왕갈비탕과 같은 단품을 먹을 수 있는 곳은 드물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가 마음속으로 원하던 음식이 메뉴로 나와서 나 혼자 화들짝 놀랄 때도 있었다(주문할 때 그냥 백반으로 주문하기 때문에 뭐가 나올지 모르고 시키는 경우가 많다). 가령 일요일 저녁에 굴국밥을 먹었는데 월요일 백반 메뉴가 굴국밥이 나온다던지, 아니면 저녁에 소고기 무국을 끓이기 위해 국거리를 사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소고기 무국이 나오는 일도 있었고, 술 마신 다음 날 얼큰한 육개장을 생각하면서 왔는데 육개장이 떡하니 나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어쩌면 전혀 신기할 게 없는 건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에 있는 메뉴라는 게 결국 육 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먹었던 초원식당의 백반 메뉴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고민을 들으면서 식당과 병원이 묘하게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고민도 일반진료를 같이 하자니 이래저래 힘들고 화상전문으로 가자니 불안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사장님이 백반을 없애고 고기 전문점으로 시도해보길 은근히 바랐다. 그게 마치 내가 가야 할 길의 예행연습이라도 되는 것인양.

“백반은 언제까지 하시게요?”

“아직 정한 건 없구요. 다음 달에 베트남에 다녀오기로 했는데 돌아와서 정해야죠” 

사장님 부인이 베트남 사람이어서 결혼 당시에 반드시 일 년에 이 주 정도는 베트남에서 지내기로 약속했는데 코로나로 몇 년 동안 못 갔기 때문에 올해는 꼭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어느새 마음속으로 내 개업 시기와 맞춰보고 있었다. (대체 왜 맞춰 보는 걸까?)

그날 백반은 돼지갈비찜이었다. 뼈째 토막 낸 돼지고기를 매운 양념에 졸였는데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언젠가 단품 메뉴에 없어서 맛있는데 왜 안 파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한꺼번에 대량으로 만들면 남는 게 좀 있는데 그거 아니면 단가가 안 맞아요. 요즘 물가면 만 원 가까이 받아야 하는데 이 동네에서 그 돈 주고 먹겠어요? 식당이 동네에 맞춰야죠.”  

하긴 병원도 동네에 맞춰야 한다. 동네가 병원에 맞춰줄 건 아니니까.      


(계속)

작가의 이전글 예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