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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r 21. 2023

여행

개원했습니다

여행     


누리가 중학생이 되던 첫해의 일이다. 누리가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 어느 시기부터 우리는 약을 끊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치의가 누리가 당시에 받고 있던 뉴로피드백 치료 결과가 좋으니 약을 끊어 보자고 했다. 

우리가 보기에도 누리는 약을 먹기 시작했을 당시처럼 오전 오후가 완전히 다른 상태는 아니었고 안정돼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약을 끊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조금은 불안했지만 동의했다. 


어쩌다보니, 아니면 중학교 1학년 담임이 남자였기 때문에 주로 내가 학부모 면담을 가게 됐다. 

“누리가 학교에서는 잘 지내나요?” 내가 물었다. 

“특별한 얘기를 들은 건 없습니다.” 담임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나는 누리가 진단받은 병에 대해서 얘기했다. 

“체육 시간에는 잘하나요?” 담임의 과목은 체육이었고, 아무래도 주로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니 누리가 다른 수업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누리가 안 하고 싶어 하면 열외시킵니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누리가 틈틈이 저한테 얘기 많이 합니다. 주로 책 얘기요. 누리가 맨날 들고 다니던 책, 제목이…… 괴물이 잔뜩 그려진 책이던데.” 누리가 당시에 가장 좋아하던 책은 러크크래프트 소설 속의 괴물 삽화가 잔뜩 그려져 있는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이라는 책이었다.  

“아, 예.” 

“아이구, 아버님 너무 걱정마세요. 한때 그러다가 다 좋아집니다. 누리 같은 애들은 형이 잘 보살피면 훨씬 더 좋아질 겁니다. 참, 누리가 영어 잘하나 봐요. 원어민 영어 선생님하고 얘기 많이 한대요. 마이클(원어민 영어 선생님)도 저한테 누리에 대해서 많이 물어봐요.” 

담임이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얘기했다. 굳은 살이 박힌 그의 손이 두툼하게 만져졌다. 


당시에 우주는 사춘기의 폭풍 속을 지나는 중이었다. 자신의 충동조차 감당할 수 없어서 좌충우돌하는 중3짜리가 어떻게 누군가를 보살핀단 말인가. 물론 담임의 의도는 누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면담 내내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으니 위로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담임은 누리의 병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고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선생님의 역할(꼼꼼한 관찰자)이 뭔지 잊고 있었다. 더군다나 체육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교과목 수업을 어떻게 듣고 있는지 알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약을 끊은 이후로 누리는 내가 알아채지 못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학교생활은 선생님의 세심한 관찰이 필요했지만 이래저래 담임이 파악하긴 어려웠다. 누리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십 년 넘게 우리 집안일을 해주시던 아주머니였다. 요즘 누리가 집에서 너무 위험하게 뛰어다녀요. 누리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내가 보기에 집에서는 큰 변화가 없어 보였는데 그건 아마도 누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방에서 보냈기 때문에 알아챌 만한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다시 담임과 면담을 했다. 누리가 원어민 영어 선생님에게 죽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누리와 얘기를 나눴다. 누리는 수업 시간 내내 거의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 내용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간단한 덧셈을 하는 데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학습 부진이 아니라 퇴행에 가까웠다. 물어보니 1학기 내내 그랬던 것 같았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지만 누리에게는 큰일이 아니라고 안심시켰고 집에 남아 있던 약을 다시 먹였다. 다음 주에 주치의와 예약을 잡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자살 충동은 학습장애로 인한 좌절감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갑자기 간단한 덧셈조차 안 됐을 때 누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행히도 약을 다시 복용하면서 누리의 집중력과 학습장애는 조금씩 좋아졌다. 내가 누리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도 좌절감도 조금은 나아졌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약을 복용하게 됐다. 누리가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즈음 경주로 가족여행을 가기로 했다. 이전까지 가족여행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반항기 가득한 우주의 막무가내식 반발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주도 반발하지 않았다. 당시에 고1이었던 우주는 여전히 틈틈이 크고 작은 사고를 쳤고 누리는 자존감이 낮고 잔뜩 움츠러져 지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최악의 시기를 점점 더 벗어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 가족은 변화의 지점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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