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했습니다
개업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뭐냐고 물으면 의외로 여행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일단 개업을 하면, 특히 초반에는, 매일 출근해야 해서 병원을 비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진짜로 실행에 옮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월급이 안 나오니까 돈 걱정도 되고 개업을 앞두고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개업과 관련해서 딱히 바쁠 일은 없었고 경제적으로 아주 빠듯한 건 아니었지만 월급이 안 나온다니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는 개원이라는 급격한 변화의 지점을 지나는 중이었고 휴식이 또는 여행이 필요했다. 서울을 떠나고 싶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누리가 고 3이 됐기 때문에 가족끼리 여행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아내는 코로나 오미크론 대유행 때문에 병원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우주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부산에 사는 오광태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오후 네 시 즈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광장으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골든리트리버와 함께 있는 거구의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베이지색 사냥모자를 썼고 회색 후드티와 펑퍼짐한 황토색 코듀로이 바지 차림이었다.
“과장님 오랜만이네요.” 내가 다가가니 광태가 모자를 들어 올려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광태는 콧수염을 길렀는데 모자를 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길게 자란 콧수염과 모자 속에 드러난 휑한 대머리가 묘한 대조를 이뤘다. 마치 모자가 그런 대조를 상상 못 하도록 차단하는 특수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웬 과장님? 그냥 형이라고 해, 임마.”
광태는 내가 잠깐 응급의학과 교수를 하던 시절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전공의였다. 말이 사제지간이지 나이 차가 네 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선후배지간에 가까웠다. 하지만 습관이 돼서 그런지 만나면 여전히 과장님이었다.
저스틴(세 살배기 리트리버의 이름이다)이 나를 보자마자 마운팅을 하려고 달려 들어서 하마터면 선물로 사온 쿠키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주위에 있던 여자가 저스틴의 과격한 환영 인사에 허둥대는 나를 보면서 웃었다.
“얘는 나보다 처음 보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니까.” 광태가 줄을 자기 쪽으로 홱 당겨서 저지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역 근처 유료주차장에 주차한 은색 말리부를 빼내서 부산항대교를 건너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마트에서 장 봐온 소고기 등심을 굽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전에 보다 체중이 조금 늘어 보이는데?”
“제가 거의 체중이 백 오에서 백 십 킬로 정도 나가는데 하루 저녁에도 오 킬로 그람 정도는 왔다갔다 해요. 재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걸요?” 그가 뭔가가 생각난 듯 안쪽 다용도실에서 양주병을 하나 꺼내오더니 스트레이트 잔에 부어주었다.
“딱 한 잔만 드릴게요.” 자신도 잔에 따라서 한 모금 마셨다. 도수가 높아서 독했지만 입안 가득 향이 그윽해졌다.
광태는 <던전 앤 드래곤> 롤플레잉 게임이 한국에 소개된 초기에 도시를 옮겨가며 하던 매니아였고(멤버 중에 한 명은 지금 룰북 출판사를 차렸다), 전용 냉장고에서 꺼낸 쿠바산 시가를 피우고, 에스프레소와 브랜디를 즐기고, 클래식 면도칼을 가죽에 갈아서 면도를 하는, 글로벌한 고급 취향을 가진 이른바 ‘있는 집’ 자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야구만은 롯데자이언츠 뿐이었다. 엘엘비고 더블유비시고 올림픽 따위는 광태의 마음속에 없었다. 내가 이 팀 저 팀 유망주와 에이스를 파악하며 국가대표 감독 마인드로 보는 타입이라면(참고로 나는 기아 팬이다), 광태는 그냥 오로지 일편단심 롯데자이언츠였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열받았던 순간은 자신의 모교인 경남고가 손민한이 아닌 ‘짭 에이스’(죄송!) 주형광이 이끄는 부산고에게 한 점도 못 내고 속절없이 무너졌던 대통령배 결승이었고,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은 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삼성과의 경기에서 응원하던 양 팀 관중들이 상대방을 향해서 던진 페트병이 라이트에 비쳐 반짝반짝 빛나던 밤하늘을 롯데자이언츠 깃발을 마구 휘두르면서 바라보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롯데는 7차전을 승리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호세가 난리 쳤던 그 경기? 롯데가 우승했나?”
“한화요. 롯데 팬은 그런 거 기억 안 합니다. 푸하하.” 스트레이트 잔에 절반 정도 남아 있던 브랜디를 마저 비웠다. 맥주를 꺼내기 위해서 일어날 때 의자에서 심하게 삐그덕 소리가 났다.
“역시 체중이 늘었어. 역에서 만났을 때 느낌이 약간, 음, 은퇴한 마피아 보스 같았어. 있잖아, 배도 좀 나오고 시가 뻑뻑 피면서 암살 명령을 내리는 …… ”
“멋진데요.” 광태가 오른손으로 배를 한 번 두드렸다.
“뭐가 멋져? 결국 회전문에 갇혀서 총 맞아 죽잖아.”
시가를 물고 있던 광태가 큰소리를 내서 웃었고 거실에 있던(저스틴은 시가 냄새를 극도로 싫어했다) 저스틴이 우리가 앉아 있는 식탁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제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해 봐” 내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제가 인생에 딱 한 번 안 뚱뚱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