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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r 23. 2023

여행(1, 2, 3)

여행     


누리가 중학생이 되던 첫해의 일이다. 누리가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 어느 시기부터 우리는 약을 끊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치의가 누리가 당시에 받고 있던 뉴로피드백 치료 결과가 좋으니 약을 끊어 보자고 했다. 

우리가 보기에도 누리는 약을 먹기 시작했을 당시처럼 오전 오후가 완전히 다른 상태는 아니었고 안정돼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약을 끊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조금은 불안했지만 동의했다. 

어쩌다 보니, 아니면 중학교 1학년 담임이 남자였기 때문에 주로 내가 학부모 면담을 가게 됐다. 


“누리가 학교에서는 잘 지내나요?” 내가 물었다. 

“그럼요. 특별한 얘기를 들은 건 없습니다.” 담임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나는 누리가 진단받은 병에 대해서 얘기했다. 

“체육 시간에는 잘하나요?” 담임의 과목은 체육이었고, 아무래도 주로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니 누리가 다른 수업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누리가 안 하고 싶어 하면 열외시킵니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누리가 틈틈이 저한테 얘기 많이 합니다. 주로 책 얘기요. 누리가 맨날 들고 다니던 책, 제목이…… 괴물이 잔뜩 그려진 책이던데.” 누리가 당시에 가장 좋아하던 책은 러브크래프트 소설 속의 괴물 삽화가 잔뜩 그려져 있는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이라는 책이었다.  

“아, 예.” 

“아이구, 아버님 너무 걱정마세요. 한때 그러다가 다 좋아집니다. 누리 같은 애들은 형이 잘 보살피면 훨씬 더 좋아질 겁니다. 참, 누리가 영어 잘하나 봐요. 원어민 선생님하고 얘기 많이 하던데요. 마이클(원어민 영어 선생님)이 누리에 대해서 많이 물어봐요.” 

담임이 면담을 끝내고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굳은살이 박힌 그의 손이 두툼하게 만져졌다. 

당시에 우주는 사춘기의 폭풍 속을 지나는 중이었다. 자신의 충동조차 감당할 수 없어서 좌충우돌하는 중3짜리가 어떻게 누군가를 보살핀단 말인가. 더군다나 둘은 서로 다른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우주가 누리의 학교생활에 ‘보이지 않는 손’을 뻗친 적이 있긴 했다. 그걸 보살핌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누리가 중1, 우주가 중3 때였다.  

“아빠, 동수 알지?” 보조석에 앉아 있던 우주가 신호 대기를 하는 중에 내게 말했다. 당시에 누리는 아침마다 축구 연습을 하기 위해서 내 차를 타고 일찍 등교했다. 

“어, 알지. 왜?” 내가 대답했다. 

“며칠 전에 동수 만났는데 3학년 수돗가에 와서 물을 먹는 1학년 짜식이 있어서 벼르고 있대.”

“그래도 때리면 안 되지. 너도 그러지마라.” 

“동수 우리 중학교 아니야.”

“근데 왜 너한테 얘기했대?”

“그 1학년 짜식이 누리야. 동수도 나한테 들어서 누리가 지랑 같은 중학교인지 알고 있었거든. 혼 좀 내줄까 하다가 갑자기 내 동생일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더래나 뭐래나.”


담임은 무관심한 건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었고 누리의 병에 대해서도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선생님에게 어떤 역할을 맡겨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체육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교과목 수업을 어떻게 듣고 있는지 알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약을 끊은 이후로 누리는 내가 알아채지 못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학교생활은 선생님의 세심한 관찰이 필요했지만 이래저래 담임이 파악하긴 어려웠다. 누리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십 년 넘게 우리 집안일을 해주던 아주머니였다. 요즘 누리가 집에서 너무 위험하게 뛰어다녀요. 누리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내가 보기에 집에서는 큰 변화가 없어 보였는데 그건 아마도 누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방에서 보냈기 때문에 알아챌 만한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다시 담임과 면담을 했다. 누리가 원어민 영어 선생님에게 죽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누리와 얘기를 나눴다. 누리는 수업 시간 내내 거의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 내용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간단한 덧셈을 하는 데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학습 부진이 아니라 퇴행에 가까웠다. 물어보니 1학기 내내 그랬던 것 같았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지만 누리에게는 큰일이 아니라고 안심시켰고 집에 남아 있던 약을 다시 먹였다. 다음 주에 주치의와 예약을 잡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자살 충동은 학습장애로 인한 좌절감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갑자기 간단한 덧셈조차 안 됐을 때 누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행히도 약을 다시 복용하면서 누리의 집중력과 학습장애는 조금씩 좋아졌다. 내가 누리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도 좌절감도 조금은 나아졌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약을 먹게 됐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즈음 몇 년 만에 경주로 가족여행을 갔다. 이전까지 가족여행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반항기 가득한 우주의 막무가내식 반발이었다. 비록 우주가 흔쾌히 가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따라오기로 했다. 고등학생이 된 우주는 여전히 틈틈이 크고 작은 사고를 쳤고 누리는 자존감이 낮고 잔뜩 움츠러져 지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와본 적이 있는 아내를 빼고 모두 경주가 처음이었다. 애들은 시큰둥했지만 나는 국사 교과서에서만 봤던 다보탑 석가탑 첨성대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왕들의 무덤 사이로 난 길을 걷는 것도 운치 있었고, 본점에서 사 먹은 막 구운 황남빵도 맛있었다. 경주에 있는 동안 내내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돌아다니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꼭 봐야 할 유적들은 한곳에 모여 있고, 걸어서 봐야 할 곳이면 어김없이 인도가 나 있고, 문화재마다 친절한 설명이 있어서 도시 전체를 누군가가 아주 오래전부터 관광을 위해서 준비시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경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언제나처럼 아내가 누리에게 약을 챙겨줬는데, 누리는 약을 받고 나서 한참 동안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우두커니 약을 보면서 서 있었다. 

“누리야, 엄마한테 할 말 있어?”

“이거 안 먹으면 안 돼요?” 누리가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했다. 

경주 여행을 하는 동안은 하루 종일 같이 있기 때문에 약을 먹이지 않았고 누리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전 해의 실패를 떠올리며 망설였지만 누리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날 이후 누리는 다시 약을 끊기로 했다.      


개업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뭐냐고 물으면 의외로 여행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일단 개업을 하면, 특히 초반에는, 매일 출근해야 해서 병원을 비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진짜로 실행에 옮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월급이 안 나오니까 돈 걱정도 되고 개업을 앞두고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개업과 관련해서 딱히 바쁠 일은 없었고 경제적으로 아주 빠듯한 건 아니었지만 월급이 안 나온다니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는 개원이라는 급격한 변화의 지점을 지나는 중이었고 휴식이 또는 여행이 필요했다. 서울을 떠나고 싶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누리가 고 3이 됐기 때문에 가족끼리 여행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아내는 코로나 오미크론 대유행 때문에 병원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우주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1박 2일 일정으로 부산에 사는 오광태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오후 네시 즈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광장으로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골든리트리버와 함께 있는 거구의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베이지색 사냥모자를 썼고 회색 후드티와 펑퍼짐한 황토색 코듀로이 바지 차림이었다. 


“과장님 오랜만이네요.” 내가 다가가니 광태가 모자를 들어 올려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광태는 콧수염을 길렀는데 모자를 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길게 자란 콧수염과 모자 속에 드러난 휑한 대머리가 묘한 대조를 이뤘다. 마치 모자가 그런 대조를 상상 못 하도록 차단하는 특수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웬 과장님? 그냥 형이라고 해, 임마.”

광태는 내가 잠깐 응급의학과 교수를 하던 시절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전공의였다. 말이 사제지간이지 나이 차가 네 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선후배지간에 가까웠다. 하지만 습관이 돼서 그런지 만나면 여전히 과장님이었다. 

저스틴(세 살배기 리트리버의 이름이다)이 나를 보자마자 마운팅을 하려고 달려 들어서 하마터면 선물로 사온 쿠키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주위에 있던 여자가 저스틴의 과격한 환영 인사에 허둥대는 나를 보면서 웃었다.  

“얘는 주인보다 손님을 훨씬 더 좋아한다니까.” 광태가 줄을 자기 쪽으로 홱 당겨서 저지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역 근처 유료주차장에 주차한 은색 말리부를 빼내서 부산항대교를 건너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마트에서 장 봐온 소고기 등심을 굽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전에 보다 체중이 조금 늘어 보이는데?” 

“제가 거의 체중이 백 오에서 백 십 킬로 정도 나가는데 하루 저녁에도 오 킬로 그람 정도는 왔다갔다 해요. 재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걸요?” 그가 뭔가가 생각난 듯 안쪽 다용도실에서 양주병을 하나 꺼내오더니 스트레이트 잔에 부어주었다. 

“딱 한 잔만 드릴게요.” 자신도 잔에 따라서 한 모금 마셨다. 도수가 높아서 독했지만 입안 가득 향이 그윽해졌다.  


광태는 <던전 앤 드래곤> 롤플레잉 게임이 한국에 소개된 초기에 영어로 된 룰북을 읽고 도시를 옮겨가며 게임을 즐기던 매니아였고(멤버 중에 한 명은 롤플레잉 게임 룰북 출판사를 차렸다), 전용 냉장고에서 꺼낸 쿠바산 시가를 피우고, 에스프레소와 브랜디 향을 즐기고, 클래식 면도칼을 가죽에 슥슥 갈아서 면도하는, 글로벌한 고급 취향을 가진 이른바 ‘있는 집’ 자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야구만은 롯데자이언츠 뿐이었다. 엘엘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올림픽 따위는 광태의 마음속에 없었다. 내가 이 팀 저 팀 유망주와 에이스를 파악하며 국가대표 감독 마인드로 보는 타입이라면(참고로 나는 기아 팬이다), 광태는 그냥 오로지 일편단심 롯데였다.  

그가 야구광 인생에서 가장 열받았던 순간은 자신의 모교인 경남고가 손민한이 아닌 ‘짭’(죄송!) 에이스 주형광이 이끄는 부산고에게 단 한 점도 못 내고 속절없이 무너졌던 대통령배 결승이었고,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은 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삼성과의 경기에서 응원하던 양 팀 관중들이 상대방을 향해서 던진 페트병이 라이트에 비쳐 반짝반짝 빛나던 밤하늘을 롯데자이언츠 깃발을 마구 휘두르면서 바라보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야구 방망이와 달걀과 라면이 더 날아다니고, 경기가 중단되고, 급기야 롯데 주장 박정태가 선수단 철수를 하는 난장판을 모두 겪은 후에 롯데는 플레이오프 7차전을 승리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홈런 친 호세가 관중석에 배트 던졌던 그 경기? 롯데가 우승했나?”

“한화요. 롯데 팬은 그런 거 기억 안 합니다. 푸하하.” 스트레이트 잔에 절반 정도 남아 있던 브랜디를 마저 비웠다. 맥주를 꺼내기 위해서 일어날 때 의자에서 심하게 삐그덕 소리가 났다. 

“역시 체중이 늘었어. 역에서 만났을 때 느낌이 약간, 음, 은퇴한 마피아 보스 같았어. 있잖아, 배도 좀 나오고 시가 뻑뻑 피면서 암살 지시를 내리는 …… ”

“멋진데요.” 광태가 오른손으로 배를 한 번 두드렸다. 

“뭐가 멋져? 결국 회전문에 갇혀서 총 맞아 뒈질 건데.”

시가를 물고 있던 광태가 큰소리를 내서 웃었고 거실에 있던(저스틴은 시가 냄새를 극도로 싫어했다) 저스틴이 우리가 앉아 있는 식탁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해 봐” 내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제가 인생에 딱 한 번 안 뚱뚱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오광태는 94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원래도 좀 유별나고 대책 없는 구석이 있던 그는 그해 여름에 혼자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참고로 94년 여름은 기상청 관측 역사상 가장 더웠던 여름이었다. 일인용 텐트를 들고 특별한 계획 없이 무작정 서쪽으로 이동했다. 정처없이 걷기도 하고 물류 트럭을 잡아 히치하이킹도 해서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여수였다. 여행을 시작한 지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수 터미널에 들어섰을 때 로비에 있는 대형 티브이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서 자신도 티브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날은 94년 7월 8일이었고, 티브에서는 뉴스 속보로 김일성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광태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는데 그중 하나는 곧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냥 여행을 하면 부산에 있는 가족과 완전 이산가족이 될 것만 같았다. 다른 하나는 곧 있을 병무청 신검이었다.  

“너 정도면 거의 면제 아니냐?”

“제가 당시에 죽도록 싫었던 것 중에 하나가 뚱뚱해서 군대 면제가 되는 거였어요. 가끔 악몽도 꿨다니까요. 아, 그땐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말이 너무 듣기 싫더라구요.”

그 길로 여수에서 부산행 버스를 탔다. 근데 웬걸, 집에 도착했더니 부모님이 각자 여행을 가시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은 너무 덥고 집에는 아무도 없고 게다가 삼 주 후에는 병무청 신검이 예정돼 있었다. 광태는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집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계속 잠만 잤다. 2주 넘게 자고 일어나서 물 마시고, 다시 자고 물 마시고 자고를 반복했다. 

“그러고 나서 병무청 가서 쟀더니 몸무게가 구십 킬로가 안 되더라구요. 기적적으로 면제에서 면제됐죠. 제 인생에서 두 자리 몸무게는 그때 딱 한 번이었을 걸요? 제 친구 놈들은 어차피 평생 뚱뚱하게 살 놈이 뭐 하러 그때 살을 뺐냐면서 더 놀렸죠.. 정작 훈련 받을 때는 완전 원상복귀가 돼서 행보관이 사이즈가 없다고 창고에서 막 꺼낸 완전 빳빳한 신삥 훈련복 줬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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