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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r 16. 2023

예감

개원했습니다

예감     

누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두 달 만에 ADHD를 진단받았다. 약을 먹은 후로 누리는 오전에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오후가 되면 지나치게 활발해졌다. 약효가 오전에는 강하지만 오후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누리의 학교생활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이 지내다가 학교가 끝나면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랬지만 누리가 친구를 집으로 데려온 적도 친구와 놀았다는 얘기를 한 적도 없었다. 아침이 되면 그림자처럼 학교에 가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쌩하니 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초등 5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누리는 거실에 있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마우스를 이용해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거의 두 달 가까이 에어컨도 틀어놓지 않은 거실에서 매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작업을 했다. 


“이거 USB에 저장하려면 어떻게 해?”

누리가 켜놓은 노트북 화면에는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악당 조커처럼 입꼬리가 위로 길게 찢어진 채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괴물을 향해 다가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를 막아서고 있는 방패연처럼 네모난 괴물은 거대한 잠자리 모양의 또 다른 괴물의 대가리 위에 놓여 있었고 붉은 발톱과 가시로 덮인 녹색 다리가 거미줄처럼 드리워져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USB에 저장하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누리가 두 달 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우연히 보게 됐다. 부서진 안드로이드, 붉은 등(燈)이 떠다니는 어두컴컴한 밤을 배회하는 알록달록한 유령,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할 것 같은 기괴한 형태의 괴물, 모두 놀라웠지만 그림에서 풍기는 묘한 귀기(鬼氣)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다.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본 것일까. 


나는 예감을 믿는 편이다. 아니다, 예감이라는 단어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에피파니 같은 종교적인 자각(의 순간) 같은 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능력이 내게 있고 없고는 둘째 치고 그날 누리의 그림을 보면서 놀라움, 불안과 함께 에피파니 같은 걸 느꼈다. 비록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그 에피파니는 내가 볼 수 없는 세상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이라는 축복을 신이 누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평범한 내게는 안 보이지만) 누리가 보는 세상 속에서는 밤마다 알록달록한 유령들이 붉은 등을 길잡이 삼아 어두컴컴한 거리를 둥둥 떠다니고, 부서진 얼굴의 반쪽을 드러낸 안드로이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친구가 되고, 기괴한 형태의 괴물들이 개와 고양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동네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마치 고흐가 사이프러스 나무 너머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무리의 소용돌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던 것처럼 누리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식탁 위에 휴대용 티슈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무신경하게 넘겼는데 매번 같은 게 같은 위치에 있었다. 확인해 보니 누리가 하굣길에 받은 휴대용 티슈를 받아서 식탁 위에 놓은 것이었다. 애니학원 홍보용 판촉물이었다. 누리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애니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누리가 집을 벗어나서 하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다는 게 기뻤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애니학원이 걸어서 가기에는 조금 먼 곳이었기 때문이다. 누리 혼자서 지하철을 타라고 하기에는 불안했다. 결국 고민 끝에 아내가 두 달 동안 누리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법을 여러 번 연습한 시킨 후에야 혼자서 다닐 수 있게 됐다. 누리가 혼자서 갔다 온 날 첫날 혼자서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난다.  


언제부턴가 나는 연극을 하고 글을 쓰는 ‘나’와 학교를 다니고 출근을 하는 ‘나’가 분리돼 있다고 상상해왔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나처럼, 혹은 영화 <패터슨> 속의 버스 운전사 패터슨처럼 예술적인 열망과 일상적인 업무가 삶 속에 공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리도 그러기를 바랐다.  

얼핏 생각하면 하나 보다는 둘을 하는 게 힘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만 해야 할 때가 더 힘들었다. 내 인생에서 우울했던 시기는 한 가지 일(물론 일상적인 업무)밖에 할 수 없을 때였다. 아마도 그건 어떤 소설가의 말처럼 한쪽의 스트레스를 다른 한쪽이 해소해주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중에 생각해보니 야구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은 야구가 나의, 아니 우리 가족의 유일한 예술적 열망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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