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국문학수업이 필요없나요?
국문학과
안드레스 세고비아와 나르시소 예페스. 클래식 기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연주자들이다. 전자는 유명 기타 브랜드의 이름이기 때문이고 후자는 영화 <금지된 장난>에 삽입된 ‘로망스’를 연주한 기타리스트이기 때문이다.
세고비아는 살롱용 악기라는 비아냥을 듣던 클래식 기타를 콘서트홀로 끌어낸 전설적인 비르투오조였다. 세고비아 이후의 기타리스트를 그의 제자와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으리라.
세고비아는 삼십 년 정도 차이가 나는 예페스를 인정하지 않았고 둘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항간에는 세고비아가 예페스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가 예페스가 여섯 줄 기타를 변형시켜 열 줄 기타를 사용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세고비아는 기타를 변형시켜 연주하는 걸 싫어했는데, 그래서 철(steel)로 된 기타줄을 사용했던 바리오스 망고레와 파코 데 루치아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그 이유로?’라는 생각이, 나도 든다. 내 생각에 더 근본적인 이유는 둘이 완전히 다른 음악관을 가진,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연주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페스는 세고비아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그의 연주는 호불호가 나뉘는 편이었는데, 어떤 곡은 투박하고 건조했지만 반면에 어떤 곡은 더 웅장하고 심지어 더 서정적이기까지 했다. 다른 연주자들이 노래하듯 연주하는 소르의 연습곡 6번을 툭툭 끊어지듯 유년의 기억을 더듬더듬 떠올리듯 연주하는 예페스의 연주를 들어보라. 연주에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각자의 답이 있을 뿐.
1961년 예페스가 위그모어 홀 연주회가 끝난 후에 청중 중에 한 명이 예페스에게 빌라로보스의 프렐류드 1번을 왜 그렇게 느린 속도로 연주하냐고 물었다, 세고비아는 그렇게 연주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예페스가 대답했다, “왜 로스트로포비치가 카잘스를 따라 해야 하나요?”
교수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학과장인 민교수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대학원 어플라이 했나?” 민교수가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아, 네.”
내가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논문 주제 빨리 정해. 생각해 본 거 있어?”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내가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민교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요. 저······ 국문학과에 어플라이 했습니다.”
민교수가 갑자기 정지화면처럼 멈췄다. 십오 초 정도의 침묵, 그러더니 갑자기 호탕하게 웃었다.
“잘했어. 남들이 하는 대로만 따라 하면 인생 재미없지.”
의무 조항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펠로우를 하는 동안 석사 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의사들은 모두 의과대학에서 석사를 따야 하나, 라는 질문이 뜬금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무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간판만을 얻기 위해서 엄청난 등록금을 내고 형식적인 (내 경우에) 수업을 듣는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디로 가야 할까.
그때까지 의사가 되는 일 외에 내가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만약 무언가를 대학원 과정을 통해서 더 배워야 한다면 그것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지도교수는 정했나?”
내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커리큘럼도 상의하고 논문도 쓰려면 지도교수가 있어야 돼. 혼자서 못해. 그건 내가 한 번 알아보지.”
석사 두 번째 학기가 끝나가던 겨울이었다.
석사과정 입학 동기들끼리 저녁을 먹는 자리였는데, 우연히 박사과정 중인 조교가 합석하게 됐다. 일부는 집으로 가고 세 명이 남아서 2차를 갔다. 전직 시인이면서 현직 학원 원장님, 박사 8학기 조교, 그리고 나.
“왜 국문학과에 들어왔다고 했죠?” 조교가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좋겠수다. 궁금하면 아무 데나 갈 수 있어서.” 조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작이 꽤 있어서 알딸딸해진 나는 조교의 말투가 조금 거슬렸다.
“어때? 잘 온 것 같아?” 시인이 물었다.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번뜩이는 분석, 그리고 열정적이고 지적인 토론, 이 모든 걸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 속의 국문학과는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수십 명이 같이 들었던 예전의 수업들과는 달리 매일 소그룹으로 국어 수업만 듣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예나 지금이나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조용하고 질문이 없다는 것. 거의 모든 수업이 한 학기에 적어도 한 번 이상 발제문을 써서 발표하고 토론을 했다. 어떻게 같은 작품을 읽고 저런 놀라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은 학생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평범했다.
“글 좀 써보겠다고 왔는데 너무 구닥다리만 파고 있으니까 한심하겠지.”
조교가 말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거슬렸지만 그의 말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의학 수업이 현재에 귀 기울여 미래에 적용하는 걸 배우는 시간이라면, 국문학 수업은 과거를 들여다보고 현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국문학과는 ‘국문학’을 연구하는 곳이지 ‘글쓰기’를 교육하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새로운 능력을 갈고 닦아서 경쟁력을 만들어 가야 하는 상황인데 이광수와 염상섭의 소설이나 읽고 있으니 답답했다.
“예전에 미얀마의 절에서 일 년 정도 살았던 적이 있어. 딴에는 어떤 깨달음 같은 걸 얻기 위해서 갔지. 근데 막상 거기 갔더니 아무것도 가르쳐주는 게 없는 거야. 거기 주지 스님은 날 만나면 매일 질문만 하더라구. 문을 오른손으로 열었냐 왼손으로 열었냐, 방에 오른발을 먼저 디뎠냐 왼발을 먼저 디뎠냐. 뭘 가르쳐 주는 것도 없이 계속 질문만 하는 거야. 일 년 동안 내내 그런 시답잖은 것만 묻더라.”
시인이 술잔을 비우고 젓가락으로 두부김치를 집어 먹었다.
“미얀마 말도 할 줄 알아요?” 조교가 약간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영어로 하는 거지. 그리고 바디랭귀지, 짜샤.” 시인이 과장하며 손을 크게 허공에 휘둘렀다.
“스님께서 영어가 짧으신 거 아닌가. 아니면? 혹시 형이?”
조교의 말에 셋이 큰 소리로 웃었다. 우리 셋은 이미 만취 상태였다. 정작 시인이 미얀마에서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리고 그게 내 경우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사실 물어보았다 한들 딱히 신박한 답을 내놨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3차는 노래방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노래방 책을 넘기면서 시인이 말했다. “너 그거 아냐? 시인은 가사 안 보고 그냥 지 꼴리는대로 ‘필’로 부르고, 소설가는 가사 안 틀리려고 악착같이 모니터 보면서 부르고, 평론가는 옆 사람이랑 어깨동무하면서 부른다.”
그날 시인은 오른쪽엔 나를, 왼쪽엔 조교를 어깨동무하고 가사와 상관없이 ‘지 꼴리는대로’ 마이크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시인도 평론가도 아닌 원장님 스타일?). 나는 마이크를 들고 흐릿해진 눈으로 화면을 겨우 쳐다보았고, 조교는 눈을 감은 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그해 겨울이 끝나고 3월에 직장을 옮겼다. 집에서 꽤 먼 곳이었다. 스무 개의 지하철역을 지나는 동안 졸다 깨다를 몇 번을 반복해야 겨우 도착했다. 당직을 서고 돌아올 때는 선 채로 졸다가 무릎이 꺾이곤 했다. 역에서 나오면 병원 입구까지의 풍경은 반듯하게 정리된 도심이라기보다는 가판들이 흩어져 있는 시골 장터에 훨씬 가까웠다. 알록달록한 몸빼 바지와 운동복 바지를 파는 트럭으로 시작해서 하늘색 플라스틱 다라이에 담긴 미꾸라지에 시선을 빼앗기고,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푸른 채소를 지나고, 오뎅과 호떡을 팔아 빌딩을 샀다는 전설의 포장마차에서 퍼지는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으면서 감자떡을 파는 가게를 끼고 돌면 응급진료센터의 정문이 나타났다.
응급실은 아담했고 당직실은 낡은 가구들과 책장으로 비좁았다. 처음 몇 달은 몇 년 만에 하는 당직 근무에 다시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당직을 선 다음에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었고 한 이틀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지만 당직은 여전히 당직이었고 경험이 아무리 많이 쌓였어도 밤을 새우는 건 가지고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바닥까지 갈아 넣는 일이었다.
당직과 당직 사이에 내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대체 몇 살까지 당직을 서야 하는 것일까?’였다. 응급의학과라면 평생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몰아세우면 할 말은 없지만 서야 하는 것과 설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서야 하지만 설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였다. 레지던트를 뽑는 것.
5월이 되면서 공보의를 마친 인턴이 몇 명 들어왔다. 오광태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광태를 만난 순간 왠지 그냥 한 번 만나고 끝날 인연은 아닌 것 같았다. 광태는 응급실 인턴 회식을 시작으로 해서 타과 인턴 때도 응급실 인턴 회식에 나왔고 급기야 응급진료센터 야유회까지 따라왔다. 야유회가 끝나고 광태를 병원 근처 맥주집으로 불러냈다. 그곳에서 광태는 기꺼이 나의 첫 번째 전공의가 되겠다고 했다.
광태가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로 첫 번째 당직을 섰던 날, 첫 당직을 기념하기 위해서 병원 근처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광태는 주황색 롯데자이언츠 로고가 들어간 검은색 야구 모자를 썼고 회색 후드티와 펑퍼짐한 조거 바지 차림이었다.
우리는 근처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순대국밥과 모듬순대, 소주를 시켰다. 광태가 모자를 벗어서 테이블 구석에 올려놓았다. 광태의 휑한 대머리가 드러났다.
“원래 뚱뚱한 사람들이 다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그런데 대머리들도 비슷비슷해요. 저는 뚱뚱한데다가 대머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진짜 구분 안 될 걸요? 웬만하면 그냥 쌍둥이 수준이죠.”
광태가 머리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밤새 자란 덥수룩한 턱수염과 모자를 벗어서 드러난 휑한 대머리가 묘한 대조를 이뤘다. 마치 모자가 그런 대조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특수장치처럼 느껴졌다.
“인턴 때보다 체중이 늘지 않았니?”
“제가 거의 백 십 킬로 정도 나가는데 아침저녁으로 오 킬로그람 정도는 왔다갔다 해요. 재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걸요?”
우리 둘은 말이 사제지간이지 나이 차가 네 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선후배지간에 훨씬 가까웠다. 광태는 <던전 앤 드래곤> 롤플레잉 게임이 한국에 소개된 초기에 영어로 된 룰북을 읽고 도시를 옮겨다니며 게임을 즐기던 매니아였고(멤버 중에 한 명은 롤플레잉 게임 룰북 출판사를 차렸다), 시가를 피우고, 에스프레소와 브랜디 향을 즐기고, 클래식 면도칼을 가죽에 슥슥 갈아서 면도하는, 글로벌한 고급 취향을 가진 이른바 ‘있는 집’ 자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야구만은 롯데자이언츠 뿐이었다.
그가 야구광 인생에서 가장 열받았던 순간은 자신의 모교인 경남고가 손민한이 아닌 ‘짭’(죄송!) 에이스 주형광이 이끄는 부산고에게 단 한 점도 못 내고 속절없이 무너졌던 대통령배 결승이었고,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은 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삼성과의 경기에서 응원하던 양 팀 관중들이 상대방을 향해서 던진 페트병이 라이트에 비쳐 반짝반짝 빛나던 밤하늘을 롯데자이언츠 깃발을 마구 휘두르면서 바라보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야구 방망이와 달걀과 라면이 더 날아다니고, 경기가 중단되고, 급기야 롯데 주장이 선수단을 철수하는 난장판을 모두 겪은 후에 롯데는 플레이오프 7차전을 승리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호세가 관중석에 배트 던졌던 그 경기? 롯데가 우승했나?”
“몰라요. 롯데 팬은 그런 거 기억 안 합니다, 푸하하.”
광태가 모듬 순대 접시에서 간을 집어서 소금에 찍어 입안에 넣었다.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내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제가 인생에서 안 뚱뚱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요.”
광태는 94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원래도 좀 유별나고 대책 없는 구석이 있던 그는 그해 여름에 혼자서 무전여행을 가기로 했다. 참고로 94년 여름은 기상청 관측 역사상 가장 더웠던 여름이었다. 일인용 텐트를 들고 특별한 계획 없이 무작정 서쪽으로 이동했다. 정처 없이 걷기도 하고 물류 트럭을 잡아 히치하이킹도 해서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여수였다. 여행을 시작한 지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수 터미널에 들어섰는데 로비에 있는 대형 티브이 주변에 사람이 엄청 많이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쪽으로 갔죠.”
그날은 94년 7월 8일이었고, 티브에서는 뉴스 속보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광태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는데 그중 하나는 곧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냥 여행을 계속하면 부산에 있는 가족과 완전 이산가족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도 또 다른 하나는 곧 있을 병무청 신검이었다.
“너 정도면 거의 면제 아니냐?”
“제가 당시에 죽을 만큼 싫었던 게 뚱뚱해서 군대 면제가 되는 거였어요. 가끔 악몽도 꿨다니까요. 아, 그땐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너무 싫더라구요.”
그 길로 여수에서 부산행 버스를 탔다. 근데 웬걸, 집에 도착했더니 부모님이 각자 여행을 가시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은 너무 더웠고 집에는 아무도 없고 게다가 3주 후에는 병무청 신검이 예정돼 있었다. 광태는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집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계속 잠만 잤다. 2주 넘게 자고 일어나서 물 마시고, 다시 자고 물 마시고 자고를 반복했다.
“그러고 나서 병무청 가서 쟀더니 몸무게가 구십 킬로가 안 되더라구요. 기적적으로 면제에서 면제됐죠. 제 인생에서 두 자리 몸무게는 그때 딱 한 번이었을 걸요? 제 친구 놈들은 어차피 평생 뚱뚱하게 살 놈이 하필 그때 왜 살을 뺐냐면서 더 놀렸죠.. 정작 훈련 받을 때는 완전 원상복귀가 돼서 행보관이 사이즈 없다고 창고에서 막 꺼낸 완전 빳빳한 신삥 훈련복 줬다니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