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국문학수업이 필요없나요?
국문학과
그해 겨울이 끝나고 3월에 직장을 옮겼다. 집에서 꽤 먼 곳이었다. 스무 개의 지하철역을 지나는 동안 졸다 깨다를 몇 번을 반복해야 겨우 도착했다. 당직을 서고 돌아올 때는 선 채로 졸다가 무릎이 꺾이곤 했다. 역에서 나오면 병원 입구까지의 풍경은 반듯하게 정리된 도심이라기보다는 가판들이 흩어져 있는 시골 장터에 훨씬 가까웠다. 알록달록한 몸빼 바지와 운동복 바지를 파는 트럭으로 시작해서 하늘색 플라스틱 다라이에 담긴 미꾸라지에 시선을 빼앗기고,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푸른 채소를 지나고, 오뎅과 호떡을 팔아 빌딩을 샀다는 전설의 포장마차에서 퍼지는 구수한 기름 냄새를 맡으면서 감자떡을 파는 가게를 끼고 돌면 응급진료센터의 정문이 나타났다.
응급실은 아담했고 당직실은 낡은 가구들과 책장으로 비좁았다. 처음 몇 달은 몇 년 만에 하는 당직 근무에 다시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당직을 선 다음에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었고 한 이틀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지만 당직은 여전히 당직이었고 경험이 아무리 많이 쌓였어도 밤을 새우는 건 가지고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바닥까지 갈아 넣는 일이었다.
당직과 당직 사이에 내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대체 몇 살까지 당직을 서야 하는 것일까?’였다. 응급의학과라면 평생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몰아세우면 할 말은 없지만 서야 하는 것과 설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서야 하지만 설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였다. 레지던트를 뽑는 것.
5월이 되면서 공보의를 마친 인턴이 몇 명 들어왔다. 오광태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광태를 만난 순간 왠지 그냥 한 번 만나고 끝날 인연은 아닌 것 같았다. 광태는 응급실 인턴 회식을 시작으로 해서 타과 인턴 때도 응급실 인턴 회식에 나왔고 급기야 응급진료센터 야유회까지 따라왔다. 야유회가 끝나고 광태를 병원 근처 맥주집으로 불러냈다. 그곳에서 광태는 기꺼이 나의 첫 번째 전공의가 되겠다고 했다.
광태가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로 첫 번째 당직을 섰던 날, 첫 당직을 기념하기 위해서 병원 근처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광태는 주황색 롯데자이언츠 로고가 들어간 검은색 야구 모자를 썼고 회색 후드티와 펑퍼짐한 조거 바지 차림이었다.
우리는 근처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순대국밥과 소주를 시켰다. 광태가 모자를 벗어서 테이블 구석에 올려놓았다. 광태의 휑한 대머리가 드러났다.
“원래 뚱뚱한 사람들이 다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그런데 대머리들도 비슷비슷해요. 저는 뚱뚱한데다가 대머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진짜 구분 안 될 걸요? 웬만하면 그냥 쌍둥이 수준이죠.”
광태가 머리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닦아냈다. 밤새 자란 덥수룩한 턱수염과 모자를 벗어서 드러난 휑한 대머리가 묘한 대조를 이뤘다. 마치 모자가 그런 대조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특수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인턴 때보다 체중이 늘지 않았니?”
“제가 거의 체중이 백 오에서 백 십 킬로 정도 나가는데 아침저녁으로 오 킬로그람 정도는 왔다갔다 해요. 재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걸요?”
우리 둘은 말이 사제지간이지 나이 차가 네 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선후배지간에 훨씬 가까웠다. 광태는 <던전 앤 드래곤> 롤플레잉 게임이 한국에 소개된 초기에 영어로 된 룰북을 읽고 도시를 옮겨다니며 게임을 즐기던 매니아였고(멤버 중에 한 명은 롤플레잉 게임 룰북 출판사를 차렸다), 시가를 피우고, 에스프레소와 브랜디 향을 즐기고, 클래식 면도칼을 가죽에 슥슥 갈아서 면도하는, 글로벌한 고급 취향을 가진 이른바 ‘있는 집’ 자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야구만은 롯데자이언츠 뿐이었다.
그가 야구광 인생에서 가장 열받았던 순간은 자신의 모교인 경남고가 손민한이 아닌 ‘짭’(죄송!) 에이스 주형광이 이끄는 부산고에게 단 한 점도 못 내고 속절없이 무너졌던 대통령배 결승이었고,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은 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삼성과의 경기에서 응원하던 양 팀 관중들이 상대방을 향해서 던진 페트병이 라이트에 비쳐 반짝반짝 빛나던 밤하늘을 롯데자이언츠 깃발을 마구 휘두르면서 바라보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야구 방망이와 달걀과 라면이 더 날아다니고, 경기가 중단되고, 급기야 롯데 주장 박정태가 선수단 철수를 하는 난장판을 모두 겪은 후에 롯데는 플레이오프 7차전을 승리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호세가 관중석에 배트 던졌던 그 경기?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했나?”
“한화가 했죠. 롯데 팬은 그런 거 기억 안 합니다만, 푸하하.”
광태가 모듬 순대 접시에서 간을 집어서 소금에 찍어 입안에 넣었다.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내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제가 인생에서 딱 한 번 안 뚱뚱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광태는 94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원래도 좀 유별나고 대책 없는 구석이 있던 그는 그해 여름에 혼자서 무전여행을 가기로 했다. 참고로 94년 여름은 기상청 관측 역사상 가장 더웠던 여름이었다. 일인용 텐트를 들고 특별한 계획 없이 무작정 서쪽으로 이동했다. 정처 없이 걷기도 하고 물류 트럭을 잡아 히치하이킹도 해서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여수였다. 여행을 시작한 지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수 터미널에 들어섰는데 로비에 있는 대형 티브이 주변에 사람이 엄청 많이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티브이쪽으로 갔죠.”
그날은 94년 7월 8일이었고, 티브에서는 뉴스 속보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광태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는데 그중 하나는 곧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냥 여행을 계속하면 부산에 있는 가족과 완전 이산가족이 될 것만 같았다. 그리도 또 다른 하나는 곧 있을 병무청 신검이었다.
“너 정도면 거의 면제 아니냐?”
“제가 당시에 죽도록 싫었던 것 중에 하나가 뚱뚱해서 군대 면제가 되는 거였어요. 가끔 악몽도 꿨다니까요. 아, 그땐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말이 너무 듣기 싫더라구요.”
그 길로 여수에서 부산행 버스를 탔다. 근데 웬걸, 집에 도착했더니 부모님이 각자 여행을 가시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은 너무 더웠고 집에는 아무도 없고 게다가 3주 후에는 병무청 신검이 예정돼 있었다. 광태는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집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계속 잠만 잤다. 2주 넘게 자고 일어나서 물 마시고, 다시 자고 물 마시고 자고를 반복했다.
“그러고 나서 병무청 가서 쟀더니 몸무게가 구십 킬로가 안 되더라구요. 기적적으로 면제에서 면제됐죠. 제 인생에서 두 자리 몸무게는 그때 딱 한 번이었을 걸요? 제 친구 놈들은 어차피 평생 뚱뚱하게 살 놈이 뭐 하러 그때 살을 뺐냐면서 더 놀렸죠.. 정작 훈련 받을 때는 완전 원상복귀가 돼서 행보관이 사이즈가 없다고 창고에서 막 꺼낸 완전 빳빳한 신삥 훈련복 줬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