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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y 20. 2024

상상(1)

어떻게 더 나은 전문가가 될 것인가

상상     


2023년 10월 16일 루마니아 적십자 자원봉사자들이 부큐레슈티에서 열린 ‘세계 심폐소생술의 날’을 기념해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음악은 비지스의 스테잉 얼라이브(Stayin’ alive), 미국심장협회와 영국심장재단이 심폐소생술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로 선정한 곡이다. 어떤 응급의학과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하는 동안 이효리의 ‘텐미닛’을 속으로 흥얼거린다고 한다. 물어보니 분당 압박수와 리듬이 비슷하고 ‘십분’이라는 시간이 심폐소생술 속에서 갖는 오묘한 느낌 때문이라고 했다. 두 노래 모두 박자가 분당 압박수와 비슷하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때론 진단할 때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고등학생이 농구대에 부딪혀서 오른쪽 옆구리가 아프다고 내원했다. 엑스레이를 찍어 확인해 보니 오른쪽 아래쪽 세 개 늑골이 연속적으로 부러져 있다. 통원치료를 설명하고 흉부외과 외래를 잡아주기로 한다. 경험이 있는 응급의학과 의사라면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봐야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권투선수의 얼굴이 펀치를 맞아 일그러지는 슬로우비디오 장면을 보는 것처럼 늑골을 부러뜨린 충격이 몸에 전해지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과연 그 충격은 세 개의 늑골만 부러뜨리고 소멸됐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연속된 하부 늑골골절이 있다면 반드시 복강내 장기 손상을 확인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연속된 상부 늑골골절의 경우 경추 손상을 확인한다. 다시 물어보니 농구대에 부딪힌 게 아니라 농구대가 쓰러지면서 옆구리를 친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외상환자의 병력 청취 과정에서 물어보는 것은 세 가지다. 시간, 장소, 매개체(vector).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다. 대학생이 강당에서 여러 명이 보조무대를 옮기는 과정에서 배를 부딪힌 후 발생한 복통으로 내원했다. 부딪힌 부분에 약간의 압통이 있는 것 말고는 특별한 소견이 없어서 진통제 투여했고 최근에 공연 막바지 준비로 무리를 했다고 해서 수액을 맞았다. 두 시간 정도 후에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고 특별한 이상소견이 없었다. 검사 결과를 설명하러 가보니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복부 경직이 있었고 복통은 더 심해졌다. 어쩌면 이 사례를 읽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은 초기 대응이 잘못된 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경험이 있는 응급의학과 의사라면 장정 대여섯 명(나중에 확인됐다)이 낑낑거리면서 옮겨야 할 정도의 무게를 가진 거대한 보조무대를 한 번쯤 상상했어야 한다. 한 손으로 가뿐히 들 수 있는 소품에 부딪힌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랬다면 응급실에 올 생각도 안 했겠지만. 

내원 당시 복부 검진이 큰 의미가 없는 건 복강에 고인 혈액이 심한 복통을 일으킬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환자는 초기에 복부 CT를 시행했어야 했다. 환자는 비장파열로 인한 혈복강으로 수술받았다. 


열여섯 살 남학생이 복통으로 내원했다. 함께 온 아버지 말에 의하면 사흘 전에 복통이 있다가 좋아졌고 오늘 갑자기 심해졌다는 것이다. 복부 진찰을 하려고 했지만 잠깐 누웠다가 곧바로 배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당시에는 응급실에 빈자리가 거의 없어서 중증 환자가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제가 내과 전문의고 여기 졸업생인데 응급실에서 복부 CT만 찍어볼 수 없을까요?” 괴로워하는 아들을 보다 못한 보호자가 부탁하는 투로 말했다.  


다시 근처 병원으로 안내하고 당직실에 들어와 있는데 당직 내과의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슨 접수만 시켜주면 자신이 알아서 검사를 하고 판독까지 받아서 퇴원시키겠다는 것이다. 결국 접수를 시켰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복부 CT를 촬영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검사대에 누워있지 못해 실패했다. 거의 세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마약성 진통제를 여러 차례 준 상태에서 겨우 촬영했다. 비장파열에 의한 혈복강이었다. 부랴부랴 외과에 연락이 됐고 수술방으로 올라갔다.  


잠깐의 진찰 동안에도 누워있지 못할 정도로 배에 힘이 들어간다는 건 복부강직이 굉장히 심하다는 것이고 그건 외과적 문제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내과적인 문제는 어련히 알아서 확인하지 않았겠는가. 외과적 문제가 강력하게 의심됐기 때문에 복부 CT를 그토록 찍고자 한 것이었다. 나중에 수술 설명을 하러 내려온 외과의와 얘기하는 걸 듣고 나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사흘 전에 환자를 혼내다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야구방망이 끝부분으로 배를 가격했다. 체면상 그건 얘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수는 덮을 수록 커지는 법이다. 부모건 의사건 간에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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