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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y 17. 2024

경험

나는 왜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었나

 경험    

 

의사라는 직업에서 천재는 가능하지만 신동(神童)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사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 중 하나가 ‘경험’이기 때문이다. 해리슨을 달달 외우고 네터의 해부학 도감을 깡그리 머릿속에 넣고 다닌다고 해도 실제 환자를 만난 적이 없다면 그냥 의학 ‘지식’일 뿐이다. 괜히 겸손을 떠느라 하는 말이 아니라 의사는 교수가 아닌 환자를 통해서 배운다. 같은 피교육자지만 전공의와 학생이 교육받는 방식이 다른 지점이다. 특히 응급의학과의 경우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건 일정 기간 동안 환자를 입원시킨 상태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응급실을 방문했다가 입원하거나 퇴원하게 되는 환자를 보기 때문이다. 레지던트가 퇴원시키는 모든 환자를 교수가 확인하고 보내면 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나마 최선의 방법은 1년차 전공의에 한해서 윗년차에게 감독하는 역할을 맡기는 것이지만 그 역시도 마찬가지다. 윗년차 역시 감독만 하고 있어도 될 만큼 한가하지 않다. 


대개는 경한 환자는 아랫년차가 맡고 중한 환자는 윗년차와 같이 보는 방식으로 일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얄궂게도 수많은 경한 환자들 속에도 항상 함정이 있다는 것. 대표적인 예를 몇 개 들자면, 상복부 통증으로 온 남자 환자가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좋아져 퇴원했는데 다시 내원하여 급성충수돌기염으로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급성충수돌기염의 압통 위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의사들이 조심하는 편이지만 여전히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테니스 치다가 종아리에 통증을 느껴서 방문한 환자를 단순 엑스레이 촬영만 하고 이상이 없어서 퇴원시켰는데 아킬레스건 파열로 다음 날 외래에서 진단되는 경우도 있다. 검사실에서 깨진 컵을 만지다가 손가락을 베인 병원 직원을 봉합 해줬는데 다음날 손가락 인대손상으로 수술을 받는 경우도 있다. 위의 모든 사례는 초기 진단과 처치가 잘못됐지만 그나마 나중에는 제대로 치료가 됐기 때문에 더 이상의 큰 피해는 없었다. 


좀 허무한 경우도 있다. 인지기능이 떨어져서 외래를 방문한 팔순의 할머니였는데, 환자가 검사를 안 받겠다고 외래에서 난리를 쳐서 응급실에서 진정제를 투여 후 검사를 하려는 목적으로 응급실로 접수했다. 인턴이 병력 청취를 하는 과정에서 당뇨가 있다는 걸 확인했고 응급의학과 의사는 기계적으로 혈당을 체크했다. 혈당 수치 20. 포도당 용액 투입 후 완전히 멀쩡해졌다. 약간 과장하면 퇴마 의식으로 귀신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최근에 소화가 안 돼서 식사를 잘 못했는데 원래대로 당뇨약을 복용해서 생긴 일이었다. 저혈당과 관련된 극적인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다행인 건 대부분 해피엔딩이라는 것. 


위험하고 심각한 경우도 있다. 두통으로 방문했지만 진찰 당시에는 통증이 사라져서 CT 촬영을 하지 않고 갔다가 같은 증상으로 다시 방문했는데 지주막하출혈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운이 나쁜 경우 사망한 채로 내원한다. 지주막하출혈의 경우 재출혈시 열 명 중 여덟 명이 사망한다. 살아서 재방문할 확률이 더 희박하다는 얘기다. 하나 더, 흉통으로 방문해서 심전도부터 심장효소수치와 심초음파까지 검사했지만 모두 정상이어서 퇴원시켰는데 나중에 심정지 상태로 내원한 경우도 있다. 대동맥박리였다. 


경험이 많은 응급의학과 의사라면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함정이 있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심각한 실수를 줄이는 몇 가지 보완책을 마련할 수 있다. 복통 환자의 경우 증상 재발시 병원에 재방문할 것과 급성충수돌기염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단순 타박상과 손가락 인대 손상은 반드시 외래를 잡아주고 통증 지속시 추가검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제 심각한 경우로 넘어가 보자. 두통 환자의 경우에 전에 신경과 동료가 얘기해 주었던 원칙을 지키면 심각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응급실을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두통이라면 무조건 CT 촬영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요추천자. 허리 쪽에 바늘을 꽂아 척수액을 채취하는 검사인데, 무조건 시행하기에는 부담이 있다. 우선 침습적인 검사이기 때문에 환자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고, 검사 후에 두통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통 때문에 왔는데 검사 때문에 두통이 생길 수 있다고 하면 누가 검사를 받고 싶겠는가. 


대동맥박리는 높은 대동맥 압력으로 인해 대동맥의 혈관벽이 장축으로 찢어지면서 대동맥이 원래 피가 흐르던 공간과 박리로 인해 분리되어 새로 생긴 공간으로 분리되는 질환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뻗어 있는 혈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두통부터 요통까지 증상도 다양하다. 흉통으로 방문했을 때에 한해서 얘기하자면, 흉부 CT 촬영을 해야만 대동맥박리를 확인할 수 있다.


생각하면 끝도 없지만 훨씬 더  복잡한 경우도 있다. 당구를 치다가 발생한 요통과 하지 근력약화로 내원한 40대 남자였는데 응급실로 들어온 후에 양쪽 하지 마비가 발생했다. 혈압이 높았지만 통증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요추간판탈출증과 2주 전에 감기를 앓은 적이 있다고 해서 길랑바레 증후군을 의심해서 요추천자를 시행했다. 요추부위 CT촬영을 시행했고 우연하게 복부 대동맥 박리가 발견됐다. 척수로 가는 혈관이 막혀 척수 신경이 손상되면서 마비가 온 것이다. 


추리 소설의 클리셰 중에 하나는 클라이막스에서 용의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명탐정이 추리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범인을 지목하는 장면이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명탐정의 추리에 감탄한다. 진단명의 과정도 최종 결과를 알고 되짚어 보면 환자의 병명은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요통과 근력약화로부터 대동맥박리를 진단하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리처럼 생기고 오리처럼 걷고 오리처럼 우는 것이 항상 오리는 아니다”라는 경구를 잊거나 너무 늦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처럼 좋은 판단은 경험에서 비롯되고 경험은 나쁜 판단에서 비롯된다. 좋은 응급의학과 의사로 성장하는 과정은 수많은 잘못된 판단을 경험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단 한 번도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다.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결정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한참이 지나서야 답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의식변화로 온 칠순의 할머니였는데 영상의학 검사를 포함한 모든 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소견이 없었다. 모든 과에서 입원을 시키지 않겠다고 해서 응급의학과로 입원했다. 의식은 입원해서 수액을 맞는 동안 좋아졌지만 오른쪽 둔부에 탁구공만한 물집이 있었다. 보호자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점점 커져 손바닥만해 졌고 매일 드레싱을 했음에도 계속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결국 일주일 정도 지나서 상처 표면이 거무튀튀해졌을 즈음에 성형외과로 전원돼 수술을 받았다. 환자의 상처가 악화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십 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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