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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May 16. 2024

관계

나는 왜 응급의학 전문의가 되었나

관계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레지던트 지원을 할 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건 ‘관계’였다. 이른바 의국 분위기, 일이 아무리 좋아도 너무 싫어하는 사람들만 득실득실한 곳에서 일할 수는 없었다. 응급의학과를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수십 명의 교수들과 그 몇 배나 되는 층층시하의 펠로우와 레지던트들을 보유한 내과 교실과 비교하면 응급의학과는 지나치게 단출했다. 이마트 옆의 동네 과일가게 수준이라고나 할까? 교수님 세 분과 두 명의 펠로우 그리고 열 명이 채 안 되는 레지던트, 진짜 가족 같은(좋은 의미로!) 분위기였다. 그 시절의 매일 매일이 너무 행복해 죽을 것 같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너무 싫거나 도저히 같이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의 집단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사실 그렇게 평가해 버리기에는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여러 병동에 흩어져 있는 환자를 보는 다른 과와 달리 같은 장소에서 일하면서 환자를 보게 되니 다른 직역들이 겪는 어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돼서 좋았다. 특히 간호사들이 그랬다. 정치적인 의도로 갈라치거나 혹은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서로가 으르렁대는 관계인 것처럼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가장 서로를 잘 이해하고 도와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더더욱 그렇다. 


내겐 고3보다 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게 바로 응급의학과 1년차 시절이지만 그 시절에도 반짝이던 순간이 있었다. 전쟁 같은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회진까지 끝내고 나면 같이 당직 근무를 했던 인턴들과 인계를 마친 간호사들과 함께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원래 피곤하면 밥보다는 술이 잘 들어가는 법이어서 너나 할 것 없이 누가 권하지 않아도 주거니 받거니 알아서 마시고 금세 목소리가 커져 조용했던 식당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모든 이들이 출근하고 있는 시간에 일을 마친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오붓하고 시끌벅적한 휴식.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휴식도 그렇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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