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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Jun 02. 2024

인공호흡(1,2)

더 나은 전문가

변화      


전선에서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된 ‘나’는 우연히 존 캐번디시를 만난다. 그와 얘기를 나누던 중 일흔이 다 된 그의 새어머니가 스무 살 연하의 알프레드 잉글소프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존 캐번디시의 초대로 스타일즈 저택에 머물면서 이 가족들 사이에 불길하고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첫 장편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은 1920년에 출판됐다. 첫 장편임에도 작가가 만들어 낸 세계관과 클리셰가 살아 있다. 시골 마을에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인 천재 탐정(푸와로)과 고지식하지만 충직한 조수(헤이스팅스)가 등장한다. 이들이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일견 평화로워 보이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갈등이 하나씩 드러난다. 갑자기 추리 소설 얘기를 꺼낸 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한 장면 때문이다. 잠자리에 든 잉글소프 부인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킨 후에 무반응 상태가 되고 의사인 바워스타인 박사는 부인의 두 팔을 붙잡아 세차게 움직여 인공호흡을 시행한다.


최근에 새 번역판이 나와 구매했다. 의사가 되기 전에는 그냥 지나쳤지만 다시 읽으면서 보니 무슨 인공호흡법인지 궁금해졌다. 사파가 노르웨이 고스달에서 구강대 구강 호흡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 만난 비욘 린드는 당시에 초등학교에서 인공호흡법을 교육하고 있었다. 팔을 올리고 등을 눌러주는 홀거-닐센 호흡법이었다. 하지만 이 호흡법은 1930년에야 등장하기 때문에 바워스타인 박사가 시행하고 있는 건 그보다 더 전에 하던 실베스터법이다. 환자의 등이 땅에 닿도록 누인 다음에 양팔을 양옆으로 팔벌려뛰기를 할 때처럼 올렸다 내리는 방법이다. 지금 보면 대체 저렇게 해서 무슨 인공호흡이 될까 싶은데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1차세계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는 실베스터법이 유일한 인공호흡법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자면, 실제로 인공호흡이 필요했던 사람에게 실베스터 법을 시행했다면 대부분 사망했을 것이다. 만약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원래 아무 처치 없이도 살아날 사람이었을 것이다.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등을 대고 누우면 기도가 막히기 때문에 인공호흡을 하기 전에 기도유지를 해야만 한다. 이후에 1930년대에 등장한 홀거-닐센 법은 환자의 배가 닿도록 눕혀서 시행하는 것으로 기도유지를 시도했지만 이 역시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사파는 두 방법 모두 환기가 되지 않음을 임상실험으로 증명했다). 결국 현대적인 심폐소생술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기도유지(머리를 젖히고, 턱을 올리고, 턱을 당기는)를 해야지만 기도폐쇄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사파가 제시한 심폐소생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면서 동시에 가장 공을 많이 들인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 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왜 흉부압박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궁금할 수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흉부압박이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심실세동과 제세동을 연구하던 존스홉킨스 병원의 쿠벤호벤 연구팀의 엔지니어였던 니커보커는 실험동물이었던 개의 흉곽을 제세동 패들로 누를 때 의미있는 동맥 파동이 발생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쿠벤호벤 팀은 이 발견을 바탕으로 임상실험을 했고 심정지 환자들에게 개흉(open chest)을 하지 않고 외부압박만으로도 맥박을 발생시킬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들의 발견 전에는 맥박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흉곽을 열고 심장을 직접 압박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조차 싫을 정도로 복잡하고 끔찍한 방법이지만 그 당시에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나마도 병원에서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소설도 변한다. 앤서니 호로비츠의 <맥파이 살인사건>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클리셰에 액자식 구성을 더한 새로운 스타일의 고전추리물을 보여준다. 이 소설 속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손자 매튜 프리처드가 등장한다. 소설 속 등장은 허구이지만 그는 실존 인물이다. 아가사 크리스티 협회의 회장이기도 한 그는 한국어판 번역본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가 쓴 서문처럼 할머니가 창조해 낸 세계관과 클리셰들은 백 년이 넘게 읽히고 있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닐 것이다. 추리 소설의 클리셰와 세계관도 세월이 지나면서 변한다, <맥파이 살인사건>처럼.  


의학도 그렇다. 2003년 8월 피터 사파는 사망했다.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쟁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사파가 시행한 임상실험의 윤리 문제였다. 사파는 자신의 동료, 실험실 연구자, 의과대학생들을 전신 마취시켜 구강 대 구강 호흡법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원자였고 아무런 심각한 합병증도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연구 윤리에 관한 규칙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은 아니었지만 존스홉킨스의 학장과 외과부장 블래이락은 의과대학생들을 자원자로 쓰는 것을 금지시켰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학생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한다는 것이 아무리 자원자라고 포장을 해도 위계에 의한 강압이 작용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요즘 말로 아이알비(IRA, Institutional Review Board)를 통과하는 게 불가능하다. 조교나 다른 연구자도 마찬가지다. 황우석 사태를 생각해 보라. 그런데 당시의 금지 이유가 좀 황당하다. 실험 당시에 연구자들이 폐렴을 예방하기 위해 사용한 광범위한 항생제 투여가 근거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그들의 도전정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는 인공호흡이 필요한 환자에게 더 이상 실베스터법이나 홀거-닐센법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있다.


당연히 내가 마주한 세상과 응급의학도 변하고 있는 중이다. 쿠벤호벤 팀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존스홉킨스 대학병원의 외과의사 블래이락은 흉부압박만으로도 폐에 환기를 시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도유지와 구조호흡이 불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파는 실험을 통해 그의 얘기가 틀렸다는 걸 증명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본인명구조술은 점점 더 기도유지와 구조호흡보다 흉부압박이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2005년 가이드라인부터는 흉부압박과 구조호흡 비율이 15:2에서 30:2로 바뀌었고 2010년부터는 ABC가 순서가 아닌 CAB를 그러니까 기도유지(A) 구조호흡(B) 흉부압박(C) 중에서 흉부압박을 우선적으로 실시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좀 웃픈 이야기지만 2000년 가이드라인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군의관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그 시기에 한국 군대 교범에는 여전히 실베스터법이 실려 있었다. 지금은 바뀌었기를 바란다. 앞서 말한 것처럼 기본인명구조술은 항상 전쟁과 함께 했고 사파의 연구는 군대에서 시작돼 일반 사회로 전파됐다. 응급조치가 필요한 곳은 시민 사회보다는 군대 조직일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21세기에 19세기 인공호흡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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