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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Jun 12. 2024

미래(1)

더 나은 전문가

미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십 년 후의 의료 시장은 이렇게 변할 것이고 응급의학은 저렇게 변할 것이고 등등.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절대로.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미래도 존재한다. 지금 씨앗을 뿌리고 노력하면 언젠가 열매가 열릴 거라는 것. 그보다 더 분명한 건 아무것도 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는 것, 그건 정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화상병원에 간 건 앞으로 화상이 촉망받는 분야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선진국이 될수록 화상 환자는 줄어든다). 무엇보다 당시의 내가 배워야 한다는 의욕으로 불타고 있었고, 가르쳐줄 스승이 있었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비슷한 성향의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응급의학과와 완전히 동떨어진 분야가 아니어서이기도 했다.


의과대학 6년과 인턴을 포함한 전공의 5년, 도합 11년을 배우고 전문의가 됐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다. 지금도 가끔 후배들에게 해주는 말인데, 국군대전병원 진료부장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전문의 면허는 운전면허와 같은 것이니 면허를 방금 딴 초보운전자처럼 조심조심 환자를 보라는 것이다. 전문의 면허는 현재 전문가여서 받은 것이 아니라 미래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받은 것이다.  


‘상상’에 등장했던 횡격막 파열 환자를 한 번 떠올려 보자. 한국에서는 응급의학과에서 초기 처치를 하고 흉부외과나 일반외과로 연결해서 수술하지만 일본에서는 구급의학에서 초기 처치부터 수술까지 한다. 일본의 의사 양성 시스템이 한국과 전혀 다르기 때문인데, 이 얘기를 몇 년 전 한일학회에서 들었을 때 한국도 응급의학과가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질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 안내를 맡았던 일본 의사는 구급의학 9년차였다. 안과 응급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서 수련 중이라고 했다.


병원에 취직해서 2주 동안 경준은 중환자실 병동 외래 수술방에서 해야 일을 가르쳐주었다. 관찰 기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입원환자를 받기 시작한 첫 주에 체표면적 52%의 화상을 입은 환자가 입원했다. 내가 받은 첫 번째 중환자실 환자였다.

“소변량이 조금 적은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파클랜드가 언제 끝나지?” 경준이 아침 식사로 사온 김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오늘 두 시요.”

“좀 더 지켜보고 똑같으면 수액량을 늘려봐. 파클랜드 끝나면 수술 계획을 잘 짜야 된다.”

내가 경준을 쳐다보았다.

“한 달 동안 상처 절반 이상을 줄이는 걸 목표로 계획을 짜. 내일 깊은 데는 에스카치고 카데바를 한 번 덮자.”


응급의학과 화상은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발전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니다. 화상 역시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증화상 환자의 생존률은 195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좋아졌다. 이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대량 수액 요법이다. 1930년 언더힐은 화상환자 상처의 물집 안에 있는 액체를 분석해서 혈장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화상환자들의 사망이 독성물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체액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44년 룬드와 브로더는 화상 체표면적을 쉽게 계산할 수 있는 도표를 제시했다. 룬드와 브로더 차트는 지금까지도 화상체표면적을 측정할 때 사용하고 있는 도표이다. 이후에 화상 체표면적에 따라서 필요한 수액량을 구하는 여러 방식들이 연구되었고, 1968년 박스터가 파클랜드 공식이라고 알려진 계산법을 제시하게 된다. 화상을 전문적으로 하는 의사들이 아니더라도 모두 아는 공식이다. 응급의학과 의사였다면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소변줄을 꼽고 중심정맥관을 잡아주고 기본적인 드레싱을 하고 거기서 좀 더 나간다면 수액량을 계산해서 내주는 것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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