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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Jun 09. 2024

제안

더 나은 전문가

제안     


석사 6학기를 거치는 동안 2년간의 펠로우 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옮겼다. 집에서 꽤 먼 곳이었다. 스무 개의 지하철역을 지나는 동안 졸다 깨다를 몇 번 반복한 후에야 겨우 도착했다. 당직을 서고 돌아올 때는 선 채로 졸다가 무릎이 꺾이곤 했다. 

응급실은 아담했고 당직실은 낡은 가구들과 책장으로 비좁았다. 처음 몇 달은 오랜만에 하는 당직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당직을 선 다음에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었고 한 이틀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졌지만 당직은 여전히 당직이었고 경험이 아무리 많이 쌓여도 밤을 새우는 건 가지고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밑바닥까지 갈아 넣어야 하는 일이었다. 당직과 당직 사이에 내가 가장 많이 고민했던 건 ‘대체 몇 살까지 할 수 있을까?’였다. 응급의학과라면 평생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몰아세우면 할 말은 없지만 서야 하는 것과 설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응급의학과 지원자가 생겼다. 오광태, 첫인상이 왠지 한 번 스치고 끝날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턴 회식을 시작으로 급기야 센터 야유회까지 따라왔다. 야유회가 끝나고 병원 근처 맥주집에서 광태를 만났다.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광태가 생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탁자에 올려놓았다. 

“제가 인생에서 두 자리 몸무게였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요.” 

그는 신입생 여름 방학 때 혼자 무전여행을 떠났다. 참고로 그해 여름은 기상청 관측 역사상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일인용 텐트를 들고 특별한 계획 없이 무작정 서쪽으로 이동했다. 정처 없이 걷기도 하고 히치하이킹도 해서 도착한 곳은 여수. 여행을 시작한 지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터미널에 들어섰는데 로비에 있는 대형 티브이 주변에 사람이 엄청 많이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쪽으로 갔죠.” 

그날은 94년 7월 8일이었고, 뉴스 속보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광태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는데 그중 하나는 전쟁이었다. 이대로 그냥 여행을 계속하다간 부산에 있는 가족과 완전 생이별을 할 것만 같았다. 그리도 또 다른 하나는 곧 있을 병무청 신검.

“너 정도면 거의 면제 아니냐?”

“제가 당시에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뚱뚱해서 군면제 되는 거였어요. 가끔 악몽도 꿨다니까요. 아, 그땐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너무 싫더라구요.”

그 길로 여수에서 부산행 버스를 탔다. 근데 웬걸, 도착했더니 부모님은 여행을 가시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은 너무 더웠고 집에는 아무도 없고 게다가 3주 후에는 병무청 신검이 예정돼 있었다. 광태는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집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계속 잠만 잤다. 2주 넘게 자고 일어나서 물 마시고, 다시 자고 물 마시고 자고를 반복했다. 

“그러고 나서 병무청 가서 쟀더니 몸무게가 구십 킬로가 안 되더라구요. 기적적으로 면제에서 면제됐죠. 제 인생에서 두 자리 몸무게는 그때 딱 한 번이었을 걸요? 제 친구 놈들은 어차피 평생 뚱뚱하게 살 놈이 하필 그때 왜 살을 뺐냐면서 더 놀렸죠. 정작 훈련받을 때는 완전 원상복귀가 돼서 행보관이 훈련복 사이즈가 없다고 엄청 툴툴 대면서 완전 빳빳한 신삥을 줬다니까요. 그때 면제됐으면 서울 올라와서 인턴 할 일도 없었겠죠.” 

“이왕 한 거 레지던트도 해.” 내가 약간 뜸을 들인 후에 말했다.

“까짓거, 그러죠뭐,” 오광태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둘은 약속한 사람처럼 동시에 생맥주 잔을 들었다.   


국문학 석사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모든 학위과정의 마무리는 논문. 일 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면서 책을 대여하고 자료를 복사했다. 자료를 읽고 밑줄을 긋고 틈틈이 글을 썼다. 가끔 과연 이 논문을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지만 매번 생각은 돌고 돌아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곤 했다.

석사를 마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관문이 남아 있었다. 논문예심은 국문학과의 모든 교수가 참석하는 행사이고, 반드시 예심을 통과해야지만 논문을 완성할 수 있다. 그해 논문을 쓰고자 하는 학생은 논문을 요약한 발표문을 써서 교수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 의사들이 철저하게 환자 파악을 하는 것처럼 국문학과 역시 꼼꼼하고 엄격한 잣대로 학생이 쓰고자 하는 논문의 주제, 논리의 정합성, 결론의 타당성을 따진다. 

예심을 받고자 하는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었고 나는 두 번째 발표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예심의 전체 분위기는 첫 번째 발표자에 달려 있고, 본인 논문의 성패는 첫 번째 질문자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첫 번째 발표자는 주제가 불분명하고 용어 선택이 혼란스럽고 논리 전개가 느슨하다고 심한 질타를 받았다. 예심장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초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음 차례였던 나는 조금 긴장됐지만 준비해 온 발표문을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발표가 끝나자 학과장이 마이크를 들었다. 

“의사라고 했죠?” 

학과장이 책상 위에 놓인 발표문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안경 너머로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부분을 건드려 주니 좋네요. 이번 학기에 완성하도록 해보세요.”


그해 가을 도서관에서 논문을 쓰고 있을 때 화상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OO인데 우리 병원에서 같이 일할 생각 없냐?”

거절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막상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볼게요.”

상어는 빛이 없는 심해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머리부위에 있는 ‘로렌치니의 앰퓰라’라는 자기수용능력을 지닌 돌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이라는 상상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있다. 호주의 원주민 구구이미트르 부족은 절대 방향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평상시에도 ‘이쪽’ ‘저쪽’ 대신에 ‘동쪽’ ‘서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과연 다른 인류에겐 없을까?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아 비활성화된 상태로 있을 뿐 모든 인류에게 잠재돼 있을 거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누구나 마음속에 인생의 방향을 판단하는 감각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일종의 인생 내비게이션. 

집으로 돌아와 대답을 미룬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니오’가 아니라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 튀어 나온 것은 아마도 그 내비게이션의 영향일 것이다. 생각은 결국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는 법, 사흘 후에 선배를 만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선배를 만나고 보름 뒤에 나와 오광태는 당직을 마치고 같이 아침을 먹기로 했다. 우리는 근처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모듬순대와 소주를 시켰다. 광태가 롯데자이언츠 로고가 찍힌 야구모자를 벗어서 테이블 구석에 올려놓았다. 

야구팬으로서 그가 가장 열받았던 순간은 자신의 모교인 경남고가 주형광이 이끄는 부산고에게 단 한 점도 못 내고 속절없이 무너졌던 대통령배 결승이었고,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은 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삼성과의 경기에서 응원하던 양 팀 관중들이 상대방을 향해서 던진 페트병이 라이트에 비쳐 반짝반짝 빛나던 밤하늘을 롯데자이언츠 깃발을 마구 휘두르면서 바라보던 순간이라고 했다. 이후에 야구 방망이와 달걀과 라면이 더 날아다니고, 경기가 중단되고, 급기야 롯데 주장이 선수단을 철수하는 난장판을 모두 겪은 후에 롯데는 플레이오프 7차전을 승리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광태가 잔을 비우고 순대 접시에서 간을 집어서 소금에 찍어 입 안에 넣었다.

“저두 그만두려구요.” 광태가 말했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건 아니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새삼 미안했다. 

“뭐 할 거냐?”

“생각해 봐야죠.”

그해가 끝나기 전에 오광태는 그만뒀다. 휴식 기간 없이 다른 대학병원으로 옮겨 응급의학과 수련을 받기로 했다. 내가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던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 생활을 그는 다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본인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가 응급의학과를 지원한 것이 단지 나와의 인간적인 친밀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정해주는 방향을 따른 것이리라. 이후에도 그는 여기에 모두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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