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공연연습
1123 공부 연기
일주일만에 연습을 하니 약간 과장을 보태면 매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게다가 낙근을 제외한 세 명은 목요일 대학로에서 한 번 더 만났으니 더욱 그렇다. 낙근의 권유로 그리고 각자의 연기에 대한 불안으로 낙근을 제외한 셋은 목요일 오후에 대학로의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공연 영상을 보게 됐다. 시간 약속을 한 건 아니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비슷한 시간에 그곳에서 만난 셈이 돼 버렸다.
대학로의 아르코 디지털아카이브에 도착하니 이미 성복이 영상을 보면서 대본에 무언가를 열심히 받아 적고 있다. 가벼운 눈인사만 하고 마치 시험기간에 자율학습실에 자리를 잡듯 털썩 앉아서 주섬주섬 대본과 연필을 꺼낸다. 얼마 후에 은하가 손을 흔들며 들어와 안내 데스크 바로 앞에 자리는 잡는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 앞에서 영상을 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제지를 당했다고 했다. 아니 그러게 왜 그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냐고, 그러려면 자리를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잡든가.
조련사는 대사보다는 리액션 위주이기 때문에 자신의 대사에서 어떤 연기를 하는지를 꼼꼼히 기록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떤 느낌으로 걷고 어떤 손동작을 어떤 느낌으로 쓰는지를 유심히 보려고 노력했다. 일부는 메모를 했지만 윤상화 배우의 촘촘하고 세밀한 리액션을 모두 적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그걸 다 적는다 한들 내가 실행할 수 있을 것같지 않았다. 일부 영상들은 음성이 없는 화면만 녹화를 했는데 오히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나중에 재생을 할 때 느낌에 집중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내가 영상을 통해서 느끼려고 했던 건 혹은 흉내 내려고 했던 단순했다.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목표를 세워봐야 어차피 불가능하니까.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 어떤 느낌으로 걷는지 그리고 어떤 손이나 몸동작들을 많이 하는지를 눈 속에 담아 보려고 했다.
“왜 그렇게 걸어?” 거실에서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는 나를 보더니 아내가 묻는다.
“조련사 흉내를 내보는 거야.”
“요즘 연습 너무 안 하는 아냐?” 아내가 농담반 진담반 묻는다.
“혼자 연습하는 게 불가능 해.”
전에 몇 번 아내가 대사를 쳐준 적이 있었는데 조련사는 대사가 너무 없고 상대역 대사가 너무 많아서 대체 누가 누구를 연습시키고 있는 건지.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하고 성복이 그다음에 온다. 성복이 영상을 본 게 도움이 많이 됐다며 연극을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보니까 여기저기 웃음 포인트가 많았다는 얘기를 한다. 관객들이 의외로 안 웃었던 의사-조련사 장면을 특유의 따발총 같은 딕션으로 빠르고 유쾌하게 설명한다. 우리 둘은 신나서 그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두서없이 떠들어댄다. 연기를 만드는 재미 중에 하나다. 머릿속에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물론 다 재미없어서 잘리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연습을 시작한다. 얼마 전 아래층에서 유쾌하게 떠들던 성복은 어느새 사라진다. 더군다나 아래층에서 신나게 떠들었던 그 장면은 들어가지도 못한다. 낙근은 성복이 대사의 톤이 일률적이고 속도가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동작들이 뻣뻣하고 시선 변화가 적은 것도 연기를 단조롭게 만드는 원인. 노인 연기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조련사-의사 그리고 형사 장면을 두 시간 넘게 연습하고 엄마와의 장면에 들어간다. 책상 위에 놓인 은하의 대본을 보니 연필과 볼펜으로 메모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단숨에 깔끔하게 끝내겠다는 은하의 장담과는 달리 대사는 자꾸 씹히고 동작은 뜨고 시선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상하게도 리딩 때 안정적이었던 엄마는 온데간데 없고 모든 게 불안정하다. 오히려 대본을 외우려 하지 않고 책상에 대본을 놓고 그냥 읽으면서 연기했을 때는 어떤 느낌이 와닿았는데 준비해 온 연기를 하니 별다른 느낌이 없다. 왜 그럴까.
다시, 낙근이 말한다. 씩씩하게 은하가 다시 하지만 이상하게 자연스럽게 일어서지 못한다.
“아 어색해. 오빠 왜 전 안 될까요?”
“은하야 감(感)이 먼저고 행동은 그냥 따라오는 거야.”
이상하게 오늘 연습은 이런 과정의 반복이다. 모두들 정답지를 보고 공부한 연기를 보여 주지만 우리가 보여주는 답은 매번 정답과 달랐다, 완전히.
개인적으로 커버댄스 연극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모든 디테일을 외워서 무대에 보여주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연기를 공부할 수 있지만 공부가 연기는 아닌 것처럼.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의 연기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완벽하게 모방한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상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은 것을 대본에 적는다고 해도 연기가 전달하는 느낌과 감정까지 온전히 마음 속에 각인되고 몸으로 구현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감(感)이 먼저고 행동은 따라오는 거라는 낙근의 말처럼(연출들이 자주 하는 말이지만) 영상을 통해서 닮고자 하는 배우의 느낌을 익혔으면 연습을 통해서 그걸 반복해서 해보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한 커버댄스 연극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