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공연 연습
1116 커버 댄스
기본적으로 클래식 기타를 연주한다는 건 기존 레퍼토리들을 ‘커버’하는 것이다. 수많은 비르투오조들이 이미 연주했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대성당, 샤콘느, 아스투리아스, 카프리스 24번 같은 명곡들을 같은 악보로 연주하는 것이니까. 비단 기타 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이 수많은 연주자들의 ‘커버’이다. 물론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연주자들 간의 미묘한 차이와 심지어 같은 연주자의 녹음도 시기별로 차이-글렌굴드가 1955년과 1981년에 두 번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완전히 다른 곡이다-가 존재하지만 결국 같은 악보를 보고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연극은 어떤가. 이미 셀 수도 없는 <햄릿>과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만들고 있을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앞으로 수없이 어딘가에서 쓸쓸하게 치러지고 있을 윌리 로만(<세일즈 맨의 죽음>)의 장례식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창작극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는 혹은 했던 수많은 연극들은 같은 대본을 바탕으로 만든 일종의 ‘커버’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시작하기에 앞서 낙근이 말한다. “일종의 커버 댄스라고 생각해.”
“사실 같은 노래도 가수들에 따라 달라지니까 우리만의 개성을……” 성복이 말한다.
“노래가 아니라 커버 댄스라니까.” 낙근이 성복의 말을 자르고 재차 커버 ‘댄스’임을 강조한다.
커버 ‘댄스’ 연극의 목표는 기성 극단이 한 공연을 정답지 삼아 연기, 동선, 무대 장치 모든 걸 똑같이 따라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성복이 말한 새로운 가수가 자신의 개성을 살려 기존 곡을 커버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들이 회사 장기 자랑 무대에 서기 위해서 블랙핑크의 안무를 무작정 따라 해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커버 댄스라는 것이다.
“너무 낙심할 것 없어. 결국 만들다 보면 우리만의 뭔가가 생길 거야.”
내가 보기엔 아무도 낙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낙심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연극이라는 것이 또 연기라는 것이 아무리 베끼려고 한들 원본과 같아질 순 없는데.
40분 정도 낙근의 이번 연극에 대한 비전과 계획 이야기를 마친 후 1막 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날 연극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와서 새벽까지 작품 분석을 했다는 낙근의 대본엔 연필과 볼펜으로 쓴 깨알 같은 글자들이 적혀 있다.
첫 연습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무대 위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고 성복은 캐릭터를 잡기 위해 이러저러한 시도를 해보곤 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사실 겨우 두 번째 연습인데 얼마나 나아질 수 있겠는가.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낙근이 중간중간에 우리에게 자기 암시처럼 말한다.
조련사가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연기의 많은 부분이 리액션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문으로 적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리액션은 배우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상대 배우의 연기에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역의 연기에도 영향을 받는다. 무대 위에 올라가면 여전히 나는 30년도 넘은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 남들의 연기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조련사, 의사, 형사가 나오는 1막 장면을 2시간 넘게 연습하고 난 후에 다시 조련사, 엄마가 나오는 장면을 한 시간 정도 연습하고 나니 저녁 7시 30분이 됐다. 중간에 은하가 연습 장면을 녹화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내가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흑역사만 남을 뿐이니까.
연습을 마치고 나니 낙근은 수심이 더욱 깊어진 것 같은 표정이다. 우린 얘기도 할 겸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우리가 만약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다면 사람들은 공연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낙근이 말한다.
‘그런 날이 올까?’라는 내 생각을 굳이 말로 옮기진 않는다.
“우리도 하면 되겠다, 뭐 그런 생각하지 않을까?” 은하가 말한다.
“대본 구해서 사람 모아서 무대에 올리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거야.” 낙근이 말한다
“사실 여러 사람이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무대나 조명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보통 생각 안 하죠.” 성복이 말한다.
“근데 나도 약간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너무 쉽게 생각했어. 우린 이미 청우 극단에서 공연한 정답지를 갖고 있고 시간도 넉넉하게 있으니 그냥 따라만 하면 어느 정도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오래 기다릴 것 없이 그냥 내년 봄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두 번 연습해 보니 택도 없어.”
연기를 만드는 과정이 보고 읽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상상하고 창조하는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실제 공연 동영상 속에서 청우 극단의 배우들은 대사와 대사 사이 그리고 대사가 없는 침묵 속에서도 촘촘하게 반응하고 새로운 연기를 만들어 넣고 역동적으로 동선을 창조해 낸다. 2018년 우리가 보았던 공연이 감동적일 수 있었던 건 대본과 공연 사이에 촘촘하게 존재하는 배우들의 상상력과 그것이 만들어낸 밀도 높은 연기 덕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시도하려는 커버 댄스가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무한한 별의 수를 헤아리려는 시도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2000년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을 시작한 지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때 첫 런쓰루를 돌렸다. 러닝 타임 세 시간. 지루했다, 너무너무. 언제쯤 재미있어지나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연극이 끝났다. 성복의 예상처럼 각색의 흔적은 미미했다.
“어, 어떻게 알고 왔냐?”
그날 극회장과 기획이 ‘담(談)’에서 혼자서 술 마시면서 괴로워하고 있던 날 찾아왔다.
“척하면 척이죠. 배우들이 아직 멀었죠?”
‘배우들이 아니라 내가 문제란다. 내가 각색한 대본이.’ 차마 그 말은 못하고 대답 대신 맥주를 따라 줬다, 극회장에게. 두 달 동안 의약분업 파업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선배들한테 욕먹으면서까지 공연을 준비한 후배들에게 이제 와서 망했다고 선언할 수는 없었다.
“오빠, 앞으로 2주나 남았으니까 희망을 가져요. 원래 우리 극회가 뒷심이 강하잖아요.”
뒷심 할애비가 있어도 넘을 수 없는 게 있단다. 다시 대답 없이 맥주를 따라 주었다. 술이 센 기획이 거침없이 원샷을 했다.
“난 지금도 재밌던데. 조금 길긴 하지.” 극회장이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재밌다구. 으이구, 이 센스 없는 놈. 그래도 재밌게 봐주니 고맙구나.
“길면 짜르면 되지.” 기획이 새로 따른 잔의 맥주를 다시 한 번 원 샷을 했다.
머릿속에 뭔가 번뜩 떠올랐다. 그렇다. 짜르면 된다. 여섯 시간이 지루하면 세 시간으로 만들고 세 시간이 지루하면 한 시간 반으로 만들면 된다. 그날 이후 매일 대사를 지우고 런쓰루를 하고, 지우고 런쓰루를 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지워, 그 당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제외하고 모든 배우들의 대사가 월급 통장의 잔고처럼 슬금슬금 줄어들었다. 주연 배우 둘은 본인들 대사가 많은 게 미안했던지 자신들의 대사를 알아서 줄여 왔다.
일주일이 지나서 리허설을 돌리니 두 시간이 안 걸렸다. 처음에는 대사가 줄어서 의기소침하던 배우들도 점점 적응하면서 좋아졌다. 진짜 기획이 말한 뒷심이란 게 발휘된 걸까. 공연은 어땠냐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는 재밌었다. 모든 관객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재미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공모전에 당선된 라디오 드라마를 생방송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간의 갈등과 욕심으로 드라마가 원작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산으로 가다가 끝이 나버리는 상황을 보여주는 코미디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엉망진창으로 드라마를 끝낸 작가가 기진맥진해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택시 기사가 오늘 라디오 방송이 너무 감동적이었다며 감동의 눈물을 쏟는다.
우리가 들인 노력이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요즘 부쩍 25년 전 극회장의 센스없는 칭찬이 떠오르는 건, 그리고 코미디의 마지막 장면이 내게 조금 위로가 되는 건, 비록 우리가 연극을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지 못한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우리가 상상하고 창작해서 만들어낸 연기의 조각들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우린 이미 뭔가를 저질렀으니 어떤 일이건 일어나지 않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