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공연 연습
1108 질풍노도
의대를 들어온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 또한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큰 문제를 일으켜 본 적이 없는 범생이였다. 하지만 내게도 딱 한 번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으니,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일주일 내내 반성문에 부모님 도장을 받아 갔고, 급기야 담임 선생님은 어머니와 면담을 했다. 수업 태도가 산만하고 수업을 방해하고 선생님께 대든다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담임 수업 시간에 산만했고, 담임 수업을 방해했고, 담임 선생님께 대들었던 것이다. 그냥 담임이 싫었다. 이유? 더도 덜도 아닌 중2병.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시기에 기타를 배우게 해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어머니는 절대 안 된다면서 완고했지만 며칠 후 나를 클래식 기타 학원에(실은 가정집) 데리고 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종합해 보면, 부모님은 둘째인 내가 형과 동생 사이에서 치이는 것 같았고, 그래서 자꾸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원하는 걸 들어주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허락했을 것이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카르캇시, 타레가, 소르 연습곡을 익혔고 레슨이 끝나면 선생님 댁에서 데이빗 러셀, 크리스토퍼 파크닝, 엠마누엘 바루에코의 연주를 듣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질풍노도의 분노도 낮은 자존감과 콤플렉스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클래식기타와 관련해서 내가 했던 커다란 착각 중에 하나는 내게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생’의 취미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연습을 더 많이 했고 질풍노도와 콤플렉스를 벗어나는데 유용한 수단이었을 뿐. 그땐 몰랐다. 어떤 일들은 꽃이 핀 후에야 이름을 알게 되는 나무들처럼 시간이 지나야만 분명해진다는 걸.
토요일에 문학반 모임에 다녀온 아내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두 가지 들었다. 하나는 문학반 소속 재학생 수가 40명 정도 된다는 것, 예전에 열 명 남짓이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다른 하나는 모두 여학생이라는 것. 남자가 0명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무리 넷플릭스와 유투브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즐거움이 있지 않나. 더군다나 남학생이 한 명도 없다니!
인터넷도 없고 책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던 시절 나는 연극반 선배들로부터 주워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슬기샘과 홍익문고에서 책을 샀다. 내가 연극반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책을 많이 읽는 선배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많았고 조한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소설가를 꿈꿨던 조한수는 학창 시절 박영준 문학상(소설)을 받았다. 그 시절 내 눈에 비친 한수는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은 사람이었다. 나는 한수가 술자리에서 하는 문학과 예술에 관한 얘기들의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했다면 현학적이라거나 잘난 척이라고 했을 법한 얘기도 한수가 하면 술자리에서 으레 튀어나오는 가벼운 연애담이나 악의 없는 뒷담화처럼 자연스러웠다.
몇 년 전 장편소설을 출판했을 때 조한수에게 전화를 했다, 내 소싯적 스승이니 한 번 읽어 보라고.
“얼어 죽을 스승은 무슨. 책은 사서 읽어볼게.” 한수가 말한다. 수화기 너머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진다. “요즘 구상 중인 소설 없어요?” 잠시 침묵. “쓰는 건 고사하고 소설이란 걸 안 읽은 지 한 십 년도 더 된 것 같은데.” 그의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들린다, 환청처럼.
그는 정신과 전문의가 된 후에는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않게 됐다고 한다. 이십 대였을 땐 모난 성격이어서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똘똘 뭉쳐 있었지만, 그래서 그 에너지로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정신과 의사가 되면서는 둥글둥글해져서 더 이상 문학이 필요 없게 된 것같다고. 그가 편안해진 건 좋은 일이었지만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닌 것 같아서 혼란스러웠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무대 위에서 전자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다. 내가 (놀라며) “형, 기타 쳐요?”라고 물으니 (아마도, 쑥스러워하며) “아이고 너 수준 되려면 아직 멀었어.”라고 답한다.
소설가를 꿈꾸던 한수는 기타를 연주하고 있고, 기타리스트를 흠모했던 나는 소설을 출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뀐 건 없는 건지도 모른다. 변함없이 진실인 게 있다면 문학과 기타라는 건 단지 껍데기일 뿐이고 우리 두 사람에게 둥금과 누그러짐의 위로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 정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