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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닌데(7)

졸업생 공연연습

by 생각의 변화

1106 평행우주


저번 연습을 마치고 나서 조련사라는 벽 앞에서 패닉상태가 돼버린 나는 낙근의 조언에 따라 윤상화 배우를 카피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소설이나 음악처럼 남의 창작물을 베낀다는 것이 왠지 찜찜했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낙근의 말처럼 그냥 윤상화 배우한테 ‘개인 교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고, 달리 표현하면 그의 연기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정신 승리를 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이것도 일종의 자위? (자위가 뭔지 아시죠? 헉, 그게 아닌데)

카피가 아닌 개인 교습을 위해 혹은 오마주를 위해선 공연영상을 봐야 하고 그러려면 예술의 전당 아르코 예술기록원에 가야 한다(풀영상은 그곳에서만 볼 수 있다). 주말에는 안 하고 평일에만 하니 결국 목요일 오후만 가능하다는 얘기. 오전 진료를 마치고 부랴부랴 예술의 전당으로 향한다.


25년 전에도 그곳에서 자료를 본 적이 있었다. 2000년,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그해에 나는 30회 정기공연 연출을 맡기로 결심했다. 공연을 준비하던 극회장과 기획을 만났다. 30회이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재학생 중에 연출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내가 연출을 맡겠다고 하니 반색(나만의 착각?)을 했다.

30회 정기공연을 위해 내가 선택한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 시간 날 때마다 예술의 전당 자료실에 들러 공연과 관련된 문헌을 읽고 영상자료를 보았다. 상영됐던 영화들과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의 공연 영상을 이것저것 찾아서 봤다. BBC에서 제작한 셰익스피어 TV 시리즈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러닝타임이 무려 6시간 이상. 대본에 나온 대사를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공연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참고로 이틀에 걸쳐서 봤다. 무대에 올리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무대에 올리려면 줄여야 했다. 무작정 줄일 수는 없으니 난생 처음 각색이란 걸 해보기로 했다. 주변 인물이었던 존과 로렌스 신부를 이야기의 중심부로 끌어오고 차원 이동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현실과 환상을 연결했다. 하나 더,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임무와 갈등을 만들어야 했다. 원작에서 로렌스 신부는 줄리엣이 죽은 게 아니고 약을 먹고 잠든 것이라는 편지를 써서 존 신부를 통해서 만투아에 있는 로미오에게 전달하려고 하지만 역병으로 길이 차단되면서 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각색한 희곡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공연에서 존 신부를 맡은 배우가 차원 이동을 통해서 로렌스 신부를 만나게 된다. 존 신부는 전해지면 안 되는 편지를 자신에게 주는 로렌스를 이해할 수 없어서 따지지만 결국 로렌스 신부의 진심에 설득돼 편지를 전하지 않는다. 로미오는 비탄에 잠겨 줄리엣의 무덤에서 독약을 마시고, 깨어난 줄리엣은 죽어 있는 로미오의 단검을 꺼내 목숨을 끊는다.


예술의 전당에 도착해 자료실이 있는 미술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음악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서 한가람 미술관에 도착한다. 이런, 내년 11월까지 리모델링 공사를 해서 휴관이란다. 단톡방에 올리니 성복이 ‘계획대로 안 되어서 축하드립니다’라는 톡을 남긴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야 쓸 게 많아진다는 내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다.


각색을 완성하고 30회 정기 공연을 같이 하자고 만난 후배가 바로 성복이었다. 감독에게는 자신의 페르소나와 같은 배우가 있다고 한다. 만약 내게도 그런 배우가 있다면 그건 성복이었다. 중저음의 발성이 풍부한 목소리, 귀에 팍팍 꽂히는 딕션,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인상.

“형, 일반 관객들은 원작의 세세한 부분을 모르는데 주제가 사랑이든 화해든 상관이 있을까요?”

까칠한 놈, 찬물을 끼얹기는. 난 이미 탈고의 기쁨과 맥주에 취해서 반박할 논리를 생각해 내기 어려운 상태였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미간만 찌푸리고 있는 사이에 성복이 방언이 터진 권사님처럼 속사포랩을 하듯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든지 아니면 사귀었다가 헤어진다든지 그 정도의 엄청난 변화가 있어야 하는 데 그렇지는 않잖아요.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바뀐 게 아니라 약간의 변화만 준 거여서 관객은 각색의 효과를 전혀 못 느낄 거예요. 근데 어차피 전 상관없어요. 무조건 할 거니까.”

작품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성복은 로렌스 신부 역을 맡았고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마치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로렌스 신부라는 캐릭터를 끄집어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 년 전부터 성복은 그때보다도 더 간절하게 이번 연극을 하고 싶어 했다. 졸업생 공연에 뜨뜻미지근했던 내가 연극을 하기로 결심했던 이유 중에는 연출로서가 아닌 배우로서 성복과 같은 무대에 서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덧붙여 내가 아쉬울 때만 찾고 그가 원할 땐 쏙 빼는 것도 좀 경우가 아닌 것 같고.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아야 쓸 게 많아지는 법이다. 다시는 연기할 일 없을 것 같았지만 결국 계획을 변경하게 되니 새로운 차원의 인생으로 진입한 느낌이다. 마치 차원 이동을 통해 베로나로 간 존 신부처럼.


대학로에 있는 아르코 예술기록원으로 가야 할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가기로 한다. 집에 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 4시가 되기 전에 도착한다. 막상 와보니 대학로가 더 나은 것 같다. 연극하는 동네여서 분위기도 맘에 들고 기록실을 이용하기도 편하고. 카페 1층 구석에 있는 컴퓨터에 자리를 잡고 <그게 아닌데> 공연 영상을 본다. 우리가 본 공연과는 조금 배우들이 달랐지만 여전히 윤상화의 연기는 빛난다. 아직 일 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걸음마부터 하나씩 떼보면 어느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집으로 돌아와 술을 마시다가 문득 당시 25년 전 각색한 대본의 몇 가지 문제점이 떠오른다. 다음은 알딸딸한 상태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자문자답.

- 평범한 한국의 대학생이 어떻게 로렌스 신부와 의사소통이 가능한가?

- 로렌스 신부가 연금술을 하는 걸로 나오잖아. 그걸로 차원을 초월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걸로 퉁 치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배경이 이탈리아인데 왜 원작은 영어냐?

- 연금술만 가지곤 좀 약하지 않나. 이왕 바꾸는 거 화끈하게 뱀파이어 어때. 역병이 아니라 사실은 뱀파이어에 감염된 사람들로 길이 차단됐던 거야. 존 신부가 감염돼서 로미오를 물고, 로미오는 관에 누워있던 줄리엣을. 어때, 완전 죽이지?

- 어떻게 끝내려고?


로렌스 신부 존 신부는 역병이 퍼진 지역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페스트가 휩쓸고 간 마을에는 썩어가는 시체들과 죽어가는 아이들로 가득했지요. 밤에는 흡혈귀들이, 낮에는 그들의 추종자들이 마을을 지배했습니다. 살아있는 자들은 그들의 먹잇감이 됐고 죽은 자들은 영혼이 사라진 채 어둠 속을 배회했지요.

존 신부는 신앙과 성수로 무장을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낮에는 태양을 방패 삼아 버텼지만 밤에는 무방비나 마찬가지였지요. 사흘째 되던 날 결국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신앙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는 흡혈귀가 된 상태로 그 지역을 통과해 로미오가 있는 곳에 도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편지를 사제복 속에 품은 채.

임무를 마친 존 신부는 죽기를 원했습니다. 흡혈귀가 된 사제라, 너무 끔찍한 운명이었지요. 그는 로미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로미오는 자신의 피를 쓰러져 있는 존 신부의 입에 흘려보내고 존 신부로부터 영생을 얻기로 했습니다. 자신을 물어달라는 로미오의 부탁은 집요하고 간곡했습니다. 거절할 수가 없었지요. 어쩌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그길로 그 아이는 줄리엣이 잠들어 있는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줄리엣의 영생을 위해서요.


어쩌면 뱀파이어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은 또 다른 평행우주 속에서 공연 중일 지도 모른다. 부디 그 세계에선 흥행에 성공하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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