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16-1)

졸업생 공연연습

by 생각의 변화

0103 새 캐스팅


예상보다 빨리 새 캐스팅이 결정됐다. 조련사-성복, 형사-영환, 의사-낙근, 엄마-은하. 선규가 처음에 본 그대로였다. 첫인상은 늘 중요하다. 특별한 ‘현타’의 순간이 오지 않는다면 바뀌는 법이 별로 없다. 낙근에게 현타는 선규의 등장이었다. 선규는 대본 리딩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을 하기를 원했고 줌(ZOOM)을 이용해서 해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새로운 폰이 도착하는 날 줌 대본 리딩을 하게 됐다. 줌의 ‘그게 아닌데’ 방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날 택배로 받은 새 핸드폰을 꺼내 유심을 교체했다. 설명에 따라 구 핸드폰을 새 핸드폰 옆에 눕혔다. 새 폰의 화면에서는 구형 폰의 정보가 마치 영혼이 빙의되듯 천천히 옮겨진다. 그 사이에 약속했던 아홉시가 되고 ‘그게 아닌데’ 방이 열린다.

오늘이야말로 동료 역의 준용까지 합류해서 진짜 완전체로 하는 첫 대본 리딩이다. 은하의 뉴스진행자 목소리로 리딩이 시작된다. 장면이 끝나면 혹은 장면 중간에 선규는 본인이 상상하는 혹은 판단하는 대본 속의 상황을 설명한다. 선규의 설명을 듣고 새롭게 알게 됐는데 형사는 등장할 때부터 코끼리 소동을 정치적 음모로 본 것은 아니었다. 취조실을 벗어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증거를 확보하면서 정치적 음모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처음 장면은 수사라는 무게를 신경 쓰지 말고 형사라는 인물의 건달같은 캐릭터를 잘 살리는 게 중요하다. 다시 들어올 때 ‘형사가 급하게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온다’라는 지문은 형사가 취조실을 벗어나 있는 동안 서류봉투 속의 증거를 통해서 정치적 음모라는 결론에 도달했음을 암시한다. 그게 ‘급하게’ 들어오는 동기일 것이다. 인물을 만들 때 ‘변화’의 동기를 찾는 건 중요하고 특히 대본에서 찾을 수 있으면 더 좋다.


리딩이 끝나고 난 뒤 동료역을 맡은 준용은 동료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혹은 의사와 짜고) 일부러 조련사를 변태로 몰아가기 위해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했다. 내 생각엔 캐릭터에 관한 어떤 의문이든 되도록 대본 안에서 답을 찾는 것이 우선이고 명확한 답이 없다면 전체적인 맥락에서 끌어내야 한다. 이 연극은 불통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러한 불통의 원인은 인물들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진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본 진실의 조각들을 전부인 것처럼 믿어 버리기 때문이다(의사, 형사, 어머니 모두 자신의 믿음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동료 역시도 자신이 우연히 본 몇 가지 장면들을 통해서 조련사가 코끼리를 ‘이상한’ 방식(성적인 대상)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다고 봐야 한다. 동료와 의사 사이에는 모종의 거래가 있다기보다는 서로에 의해서 강화된 확증편향이 있는 것이다.


토요일은 낙근의 병원에 모여서 리딩을 하기로 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길찾기 기능을 통해서 더듬더듬 가다 서다를 몇 번 반복했다. 결국 몇 번 시행착오를 거쳐서 내부순환로를 따라서 동쪽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고가도로 밑의 횡단보도를 건너서 내려오다가 건너편에 재개발을 앞둔 스산한 풍경의 밀집된주거지역이 보였다. 입구 쪽에는 주거지역 안쪽으로 차량을 통과시키는 것과 관련돼 상반된 주장을 하는 두 개의 플랜 카드가 걸려 있었다. 밤안개라는 간판을 단 술집과 이제는 거의 사라진 음료와 과자를 파는 구멍가게들을 지나 사거리가 나오고 주유소 옆에 있는 병원 건물이 보였다. 병원 앞 큰 길가를 따라서는 일정한 크기로 잘 정리된 간판들이 걸려있는 상가 건물이 보였다. 지하철 역에서 사거리까지 오는 십 분 동안 이삼 십년의 시간이 지나가 버린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줌 리딩 후에 낙근은 자신에게 형사 역으로 리딩할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요청했다. 진료가 조금 늦게 끝나서 오는 은하가 오기 전에 나와 낙근이 형사 역을 번갈아 가면서 읽었다. 선규는 낙근의 형사가 여전히 엘리트 느낌이 강하고 전혀 건들거리는 느낌이 없다고 했다. 둘 모두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형사 역에는 부족하지만 그나마 영환을 통해서 만드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낙근은 걱정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말들을 몇 마디 덧붙였지만 선규는 오히려 깐죽거리고 자뻑인 의사역에 낙근이 딱이라며 그 역을 맡으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 원안으로 확정.


(계속)

작가의 이전글그게 아닌데(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