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공연 연습
0103 새 캐스팅
새 캐스팅으로 다시 처음부터 읽는다. 낙근은 본인이 제시했던 의사의 캐릭터를 아주 잘 수행한다. 그가 하는 걸 듣고 있으니 그동안 그가 꾸준하게 요구해왔던 의사의 캐릭터가 뭔지 알 것 같다. ‘아유 낙근이 딱이다’라고 선규가 추임새를 넣는다. 근데 저번 줌 리딩할 때도 그렇게 느꼈는데 너무 잘 어울린다. 나는 의사와 형사를 하루 사이에 오갔더니 조금 혼란스럽다. 초반을 좀 더 가볍고 익살맞게 만들고 중반 이후에는 굿캅 배드캅 역할을 오가면서 변화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은하는 이전에 캐릭터와는 달리 좀 더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어머니 캐릭터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성복은 변화무쌍한 조련사라는 역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다. 너무나 많은 리액션을 만들어야 하므로 전에 은하가 표현했듯 영혼을 갈아껴야 하는 수준이 돼야 한다. 마치 몽글몽글한 아지랑이 같은 예전 폰의 영혼을 스캔해서 동기화시키는 새 아이폰처럼.
선규는 형사의 대사 ‘정직만이 널 지킬 수 있는 무기다’와 의사의 전화 받는 연기에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코믹한 디테일들을 스포일한다. 성복이 동작을 따라 하면서 즐거워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재밌을 것 같지만 막상 하면 우리만 재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이니 뭐라도 시도해야 웃길 가능성이 생기리라. <마트로시카>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인데, 코믹연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깔끔하게 하기보다는 좀 군더더기 같더라도 웃음을 만드는데 충실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특히 연극 초반. 초반에 웃기지 못하면 후반에는 웃길 수도 살릴 수도 없다.
리딩이 끝난 후 낙근은 후반부의 클라이맥스에서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장면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했다. 이 연극은 조련사가 타인의 불통을 이해하고 득도를 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체념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 속으로 코끼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선규는 조련사가 의사 형사 어머니 순으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 완전한 체념 상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지만 낙근은 체념 한 가지의 정서로만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정리해 보면 체념 상태인 것에서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같지만 완전히 체념해서 아무 기운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 만들다 보면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내 생각에도 조련사가 체념한 것은 맞지만 의사의 분석을 들으며 공감하고 형사의 지적을 통해서 분노하고 어머니의 백일몽 속에서 자신의 소망을 드러내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가 살아야 장면이 살 수 있다.
연습을 마치고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낙근에게 병원으로 오는 동안 보았던 플랜카드에 대해서 묻는다. 그곳이 바로 철거를 눈앞에 두고 있는 미아리 텍사스란다. 오래전에 대대적인 단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있구나. 이미경 작가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에 뜬금없이 은하가 작가가 남자가 아니냐고 묻는다. 작품이 너무 야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란다. 음, 나머지 남자 넷은 전혀 동의하지 못한다. 참고로 저번에 성복이 들고 있던 맥심 잡지가 너무 야하다며 빅시스터 은하의 검열에 걸려 짤렸다. 그보다 수위가 낮은 건 상품성이 없어서 아예 안 팔릴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은 나만 한 건가.
고기를 집게로 뒤적거리던 성복이 지하철에서 우연히 멘사(MENSA) 로고가 찍힌 에코백을 들고 탄 승객을 봤다는 얘길 하면서 의사가 그 가방을 들고 나오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멘사 말고 멘살은 어때. 짝퉁으로" 선규가 덧붙인다.
“알(R)을 옆에 조그맣게 써?” 낙근이 말한다.
“멘살 가방에서 맨살 사진이 있는 맥심이 나오면 재밌겠네요” 내가 덧붙인다.
점점 ‘그게 아닌데’가 ‘그게 아잰데’가 돼 가는 중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