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17-1)

졸업생 공연 연습

by 생각의 변화

0110 인물분석


선규가 대본리딩이 너무 부족하니 일단 대본리딩을 많이 해보자는 얘기를 했을 때 나는 반신반의했다. 리딩보다는 일단 장면을 부지런히 만들다 보면 대사도 외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물 분석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줌 리딩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장면 연습을 할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인물의 심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수요일에 줌리딩이 끝나고 나서 낙근이 몇 가지 쓴소리를 했다. 조련사는 감정의 변화에 따른 적절한 리액션이 부족하고, 형사는 대사를 치는 톤과 속도가 너무 단조롭고, 엄마는 유일하게 역할이 안 바뀌었음에도 대본 숙지가 안 돼 있다고 했다. 나는 줌 리딩을 할 당시에도 어느 정도 대사 암기가 돼 있었는데 막상 같이 리딩을 하면서 감정을 넣으려다 보니 순서가 헛갈릴 때가 많았다.


너무 뻔한 얘기지만 대사의 순서를 헛갈리지 않으려면 형사의 심리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형사의 심리를 이해해야 조련사를 취조하는 순서를 이해하게 되고, 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결국 그러한 ‘정보의 배치’가 작가가 의도한 플롯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줌리딩이 끝나고 나서 틈틈이 대사를 외웠다. 그러면서 형사가 제시하는 근거들의 순서를 눈여겨보게 됐다.

형사는 처음 등장 이후에 손님(보좌관)때문에 두 번 퇴장한다. 첫 등장 당시에는 조련사를 참고인 정도로만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다시 등장할 때는 급하게 ‘서류봉투’를 들고 등장한다. 이후의 취조 장면으로 미루어보면 서류봉투 속의 증거들이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건 코끼리는 도망간 게 아니라 조련사가 고의로 풀어줬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증거는 밧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 증거는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에 코끼리들이 유세장에 난입했다는 것. 형사는 조련사를 몰아붙여서 경쟁 후보인 김창건 의원과의 연관성을 자백 받아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여기서 형사는 보좌관을 배웅하기 위해 다시 퇴장한다.

‘큰 상자’를 들고 다시 등장한 형사는 배드캅에서 굿캅으로 역할을 전환해 조련사를 달래고 회유하기 시작한다. 이런 심리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2003년 속리산 야유회 사진 속 이남걸 관장(동물원). 이것이 조련사가 주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관장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김창건 의원은 동향 사람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전대석 의원과 동물원 관장 이남걸과 공모해서 조련사를 시켜서 코끼리의 임태규 의원의 유세장 습격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게 형사 강민호가 완성시킨 코끼리 탈출 사건의 전모이다. 동시에 내가 형사로 연기하는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할 생각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다시 교회에 모여 연습을 했다. 준용이 합류해서 여섯 명 완전체로는 처음으로 대본 리딩을 하게 됐다. 나는 동료가 들어오기 전까지 외워서 리딩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대본을 보면서 했다. 중간중간에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대충 암기가 된 것 같았다. 낙근은 엄마 장면이 끝나고 난 후반부가 다소 지루하다는 얘길 하면서 선규에게 연출이 먼저 대본을 정리해야 하지 않냐고 했지만 연출은 일단 그대로 대본을 숙지한 후에 나중에 정리하자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낙근이 연기하는 의사는 꽤 완성돼 보였고 무엇보다 독창적이었다. 청우 극단을 포함한 우리가 참고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캐릭터라서 더 마음에 들었다. 본인은 두 곳의 캐릭터를 조합한 거라고 했다. 무대에 올랐을 때의 모습이 기대된다.


근처 중국집에 시킨 저녁이 오기 전까지 동료가 등장한 이후의 장면들을 다시 리딩한다. 은하는 여전히 강한 엄마와 부드러운 엄마, 혹은 선규와 낙근의 조언 사이를 방황하고 있고 조련사는 조금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캐릭터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은하는 낙근이 연기를 만든 방식을 참고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결국 연기는 연기자의 몫이고 특정한 연기자들을 아무리 참고해도 결국엔 자기 자신이 돼야 한다는 것.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조련사는 전반부에 비해서 후반부가 대사도 많고 감정이 폭발하는 곳이 많은데 전반부에서 감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후반부로 넘어오면 뭔가를 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배역에 짓눌린다고 해야 하나. 내가 듣기에는 성복이 내뱉는 대사들이 다소 급하고 휙휙 버려지는 게 너무 많다. 은하가 최근에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은 애써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유롭고 그라운딩된 소리에서 나온다’는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배우가 내뱉는 모든 대사는 연주자가 연주하는 음표와 같아서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돼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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