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공연일지
0214 호사다마
줌 리딩을 시작하기에 앞서 낙근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낙근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걸로 마무리하는 청우극의 경우를 얘기했다. 선규는 청우극의 마지막 장면이 너무 소박하고 초라해서 그보다는 대본에 있는 것처럼 화려한 서커스 쇼로 끝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은하와 성복의 의견도 초원보다는 쇼가 나을 것 같다고. 나 역시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화려하게 하면서 끝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비록 여전히 불통이고 극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조련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마무리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둡게 혹은 소박하게 끝낼 필요는 없다. 가능하다면 화려한 쇼 안에 슬픔이 있는 것처럼 끝내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내 생각엔 다른 이유를 떠나서 첫 졸업생 공연이라는 우리들만의 축제가 그렇게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조련사-어머니 장면이 끝난 뒷부분을 두 번 읽었다. 조련사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저번 주 줌리딩때는 모두를 걱정하게 만들었는데 이번 줌 리딩은 지금까지 조련사 중에 가장 좋았다. 특히 마지막 대사는 모두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감을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결국 이 연극의 완성도는 조련사에 달려 있다. 연출도 이번 줌리딩이 만족스러운 것 같다. 그냥 리딩이 아니라 감정의 향연과 연기 같았다고.
토요일 연습을 앞두고 선규는 그동안 리딩하고 연습했던 것을 바탕으로 대본을 첨삭해서 올렸다. 대부분 그동안 얘기했던 것였고 새로 빼거나 바꾼 것은 별로 많지 않았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생한다. 토요일 아침 낙근이 수정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올렸다. 잔뜩 화가 난 사람같은 목소리가 느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도 의견을 올린다. 아마도 낙근의 강력한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리려는 물타기 시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선규는 낙근과 내 의견에 불같이 화가 났고 급기야 단톡방을 나가 버렸다. 이런! 아마도 낙근의 글에서 느껴지는 강한 반발에 내 동조까지. 물타기는 커녕 기름을 끼얹은 꼴이 돼버렸다. 오전 내내 선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으로 운전을 해서 오는 동안 왜 내가 쓸데없이 톡을 올렸을까를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착잡한 마음에 성복에게 전화를 했다.
“많이 바뀐 것도 아니고 대부분 연습하면서 얘기했던 거예요. 그런데 엄청 바뀐 것처럼 비판 비슷하게 하니 화가 나셨겠죠. 어쨌거나 대본 정리하느라고 본인도 애많이 썼는데 화날만 하죠. 결국 낙근형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요?”
집에 도착할 무렵 낙근에게 전화했다, 만약 낙근이 “그 정도 얘기도 못하냐? 못할 말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나오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잔뜩 하며. 그렇게 되면 이 연극 완전히 쫑나는 건데. 하지만 막상 전화를 받은 낙근도 잔뜩 풀이 죽은 상태다. “내가 잘못했지 뭐.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데 선규형이 전화를 안 받는다.”
우린 대책 회의를 하기 위해 만나기로 한다. 장소가 은하 병원 근처여서 은하 병원에 들렀는데 문을 열자마자 나를 보고 말한다.
“얘 너는 왜 그런 걸 올려 가지고 연출 속을 뒤집어 놓냐.”
“그러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할 말 있으면 오늘 연습 때 얘기하면 되는데”
“그동안 선규 오빠가 쌓인 게 많았어. 아슬아슬한 순간이 좀 많았니? 참다 참다 폭발한 거지.”
삼십 분 후에 근처 커피숖에서 낙근이 합류한다. 낙근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신이 약을 먹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아유, 오빠 그 정도는 아니예요.” 은하가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워딩이 너무 세고 너무 직설적인게 문제죠. 이럴 때 먹으면 좋은 기적의 명약이 있어요. 도파민 아고니스트면서 안타고니스트 역할도 해서 도파민 모듈레이터라고 하는 약인데……”점점 약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아주 친한 사람들도 서로 맞는 부분은 30퍼센트 정도래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리 친해도 서로에 대해서 대부분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내가 뭘 잘못했나? 얘들이 날 무시하나? 나만 빼놓고 지들끼리만 얘기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다니까요. 배우와 연출인 관계도 그렇고. 게다가 오빠는 전 연출이고 선규 오빠는 현재 연출이니까 그런데서도 오해가 생길 소지가 다분하죠. 오빠, 구조와 경계를 인정하세요. 상명하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사전달 체계가 연출에서 배우로 전달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견 제시를 하더라도 선을 지키세요.” 은하가 간만에 일장연설을 한다.
“은하야, 너 오늘 진짜 정신과 의사 같다.” 낙근이 웃으며 말한다. 은하가 가고 준용이 오면서 우린 장소를 옮겨 술을 마시러 간다. 장소를 옮겼지만 대화 주제는 같다. 어쩌다 보니 낙근의 직설적인 성격에 대한 성토 대회가 돼가는 중이다.
“지난 번에 연출 없이 연습하던 날 있잖아요? 그때도 형이 디렉션을 이것저것 했는데 이 사람이 날 싫어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듣고 있다보면 욱하는 순간이 있어요” 성복이 말한다. 술도 잘 안 마시는 성복이 웬일로 소주도 마시고 있다.
“제가 연습 처음 보러 왔을 때 형이 성복이 디렉션 해주는 거 보면서 무서웠어요.” 준용이 말한다.
성복의 그간 쌓였던 얘기를 듣다가 낙근이 성복에게 조련사 연기가 할만 하냐고 묻는다.
“사실 전 윤상화 배우보다 잘할 자신 있어요” 성복이 대답한다.
우리 모두는 눈이 동그래진다. 그게 가능한지를 떠나서 성복이 저런 식의 자신감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약간의 취기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함을 가지고 각자의 방향으로 뿔뿔이 헤어진다.
다음날 아침 선규에게 전화를 한다. 통화음이 꽤 여러 번 가지만 받지 않는다.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선규가 받는다.
“형, 어제 일은 죄송해요. 오늘 형 댁 근처에서 만나죠. 낙근 형이랑 갈게요.”
“그래.”
다행히도 별로 화가 나 있는 목소리는 아니다. 나는 낙근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시간을 정한다. 근데 묘하게 근육통이 있다. 술이 덜 깬 것과는 조금 다른 찌뿌둥한 기분. 둘째의 독감 검사를 위해 가져온 키트로 검사를 한다. 이럴 수가, 독감이 아니라 코로나 양성. 낙근에게 전화해서 마스크를 끼고 오도록 전화한다. 우리 둘은 마스크를 낀채 약속장소로 향한다. 하필 이 타이밍에 웬 코로나?
형사의 대사처럼 지금 코로나나 걸릴 한가한 타임이 아닌데.
사죄를 하러 가는 둘이 마스크를 끼고 가는 모양새가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선규 형이 진짜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떡하죠?” 내가 묻는다.
“글쎄, 그럴 지도 모르지.” 낙근도 약간 풀이 죽어있다. 전날만해도 선규형이 원래 마음이 모진 사람이 아니어서 절대로 그렇진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속 장소까지 가면서 조금 헤매다가 도착한다. 앉아 있는 선규의 표정이 그만두겠다고 얘기를 할 것 같지는 않다. 낙근이 먼저 그리고 내가 나중에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얘기를 한다. 내가 차를 주문하는 동안 둘이서만 얘기를 나눈다. 아마도 그동안 쌓였던 얘기를 한 것이리다. 어제 우리가 낙근에게 했던 얘기와 비슷한 내용의. 본인도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도 이번엔 예방주사를 한 번 맞은 거라고 생각해요.” 낙근이 말한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앞으로 뒷풀이를 자주 해야 겠어. 서로 얘기도 좀 하고 그러면서 쌓인 것도 풀고.” 선규가 말한다.
우린 다시 연출과 배우, 선배와 후배 관계로 돌아와 <그게 아닌데>에 대한 이야기와 조련사 성복의 놀라운 자신감에 대해서 얘기한다. 선규는 이번 연극을 진짜 잘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다시 한다. 매일 대본을 읽고 또 읽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녹음파일들을 수시로 들어본다고 한다. 본인이 검색한 코끼리 가면(할로윈 코스툼용)을 보여준다. 서커스 쇼에 잘 어울릴 것 같다.
선규와 나는 같은 병원에 십 년 넘게 있었는데 선규는 몇 번 ‘억까’(억울한 까임)를 당했다.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지만 병원장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당시 원장과 이사장에게 혼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그들이 화를 내는 근거라는 게 같이 근무하는 B는 찍소리 없이 나와서 수술하기 때문이란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B가 이상하거나 과한 거고 선규가 정상인 건데,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원래 두 눈이면 이상한 놈 되는 법이다. 그 외에도 B 때문에 받은 피해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그쯤되면 나라면 평생 안 보고 지낼 것 같은데 선규는 지금도 B와 가끔씩 만난다. 피해를 보긴 했지만 그 때문에 인간관계를 칼같이 자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낙근이 얘기했던 선규의 성격과 왠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저번에 만났을 때 B한테 가장 잘한 게 거기서 빠져나와 개원한 거고, 가장 후회하는 게 좀 더 빨리 그만두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형사의 대사처럼 충성에 대한 보답은 처분이다. 폐기처분. 아니, 탈출인가
”형, 탈출은 지능 순이래” 낙근이 농담처럼 덧붙인다. 자신이 사이비 종교에서 빠져나온 걸 두고 하는 얘기다. 나는 선규가 나간 뒤 2년 뒤에 나왔으니 내 지능이 조금 더 낮은 거군.
글은 말과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르게 연기(말)를 하는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린 글 속에서 말 속에 숨겨진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게 요즘 배우가 된 내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쓴 글이 그냥 글자만으로 읽힐 거라고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이번의 소동이 한 번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고,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를 큰 사고를 막는 예방주사가 되었길 바란다. 아무리 친하고 오래된 사이여도 선을 지키고 타인을 배려하는 경험이 됐으면 한다. 우선 나부터. 은하의 말처럼 우리가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상대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고작 30퍼센트 밖에 되지 않으니까. 어쨌든 연습은 다시 계속된다, THE SHOW MUST G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