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23-1)

졸업생 공연 연습

by 생각의 변화

0221 MBTI


둘째가 B형 독감인데다가 나까지 코로나 양성으로 확진되면서 연휴 때 예정됐던 모든 가족 모임을 취소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확진이 됐을 때처럼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몸도 무겁고 사람이 너무 많은 곳에 가는 게 꺼려져서 자연스럽게 ‘집콕’을 했다. 아내에게도 옮기면 안 되니 거의 ‘방콕’ 수준. 가끔 넷플릭스를 보기도 했지만 거의 책을 읽었다. 나중에 각색할 때 참고하려고 <마리아>를 보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샀던 에이미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에 러시아로 돌아온 로스토프 백작이 평생 호텔에 지내야만 하는 감금형을 받은 후에 그가 호텔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가 소설 내용의 전부이다. 어쩌다 보니 코로나로 방에서만 지내고 있는 내 사정과도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마리아>도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던 시절의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의 얘기다. 줄거리만 봐서는 딱히 매력적인 부분이 없고 700쪽 넘는 분량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내내 미뤘던 것 같다. 하지만 책을 펴고 단숨에 200쪽 넘게 읽었다. 볼셰비키 혁명 후의 러시아,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사회가 품고 있는 불안, 역사는 결국 돌고 도는 것이고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조용하고 무거운 진실. 거기에 더해 사소하고 작은 디테일을 이용해서 풀어나가는 작가의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까지. 중고로 산 걸 약간 후회하며 고민 끝에 에이미 토울스의 다른 소설 두 권을 더 사기 위해 외출하기로 했다. 외출을 하려고 거울을 보니 수염이 조금 자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형사 역을 위해서 좀 더 길러볼까. 단톡방에 의견을 물으니 선규가 진료하는데 크게 무리가 되지 않으면 연습 때까지 길러보라고 한다.

요즘 여러 권을 병렬독서를 하는 중이어서 서머싯몸의 회고록 <summing up>도 같이 읽었다. 정 해석이 안 되는 문장들은 챗지피티를 이용해서 해석했다. 직역, 의역, 문학적인 번역, 세세한 문법적인 해설까지. 와! 진짜 완벽하다. 친구 얘기로는 전형적인 AI 초짜들의 사용 방식이란다. 초짜거나 어쨌거나 너무 만족스럽다. 코로나 방콕이 내게 준 두 번째 선물이다.


수요일 줌 리딩은 이번 주 쉬기로 했다. 사실 하기로 했어도 몸 상태도 좋지 않고 기침도 계속 나와서 어려웠을 것 같다. 원래 이번 주 토요일에는 내 연습은 없었지만 어차피 은하는 병원이 늦게 끝나서 5시 이전에는 도착할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좀 일찍 모여서 의사 형사 조련사 장면을 연습하기로 했다. 선규가 지금은 조금 길이가 애매한 것 같다며 일주일 정도 수염을 더 길러보는 걸 권했다. 낙근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에 선규가 나의 MBTI를 물었다. 해본 적 없다고 했더니 T인지 F인지 물었다.

“전 아마도 F” 내가 말한다.

“전 T” 성복이 대답한다.

“낙근이는 좀 헷갈려. T같기도 하고 F같기도 하고.” 선규가 말한다.

작품 분석을 할 때 낙근은 T처럼 보인다. 내 생각에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서브텍스트를 꼼꼼하게 찾아내는 감각은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완전한 F의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즉흥적이고 쉽게 감동하고 감정 표현을 잘 하는 걸 보면 F에 가까워 보인다. 놀랍게도 우리 셋 모두 같은 생각이다.

“근데 갑자기 MBTI는 왜요?” 내가 묻는다.

“난 의사와 형사의 대화가 전형적인 T와 F의 대화처럼 느껴져” 선규가 말한다. 얼마 안 돼서 낙근이 나타난다. 선규가 대뜸 묻는다.

“난 반반이야.” 낙근이 말한다. 역시 우리가 맞았군. 생각해 보니 의사 형사 조련사는 MBTI가 TF, F, T의 조합이다. 골고루네. 치킨집 조합같군. Fried(후라이드) 반 Tanning(양념) 반. 우린 아주 오랜만에 첫 장면을 연습한다. 성복은 첫 리딩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다양한 리액션을 표현하는데는 어려움을 느낀다. 의사는 톤이 안정적이지만 변화가 없어 조금 밋밋해 보인다. 장면을 계속 반복적으로 연습하면서 풀어가야 할 문제다. 청우극이 조련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리액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선규가 연출하는 장면은 좀 더 동기가 가시적인 동기가 많아서 이해하기 쉽다.

형사가 등장한다. 나 역시도 대사를 외웠지만 시선처리와 목소리도 안정감이 없고 동선을 신경 쓰느라 대사를 자꾸 잊어버린다. 장면을 만들면서 보니 세세한 부분들이 조금씩 신경에 거슬린다. 일단 연습장소의 책상의 길이가 너무 길다. 의자의 팔걸이도 자꾸 걸리적 거린다.

“그런데 형사가 퇴장하면서 비둘기, 거위, 원숭이 흉내 내잖아? 이거 왜 하는 거냐? 나도 잘 몰라서 묻는 거야” 선규가 묻는다.

청우극에서는 형사가 의사를 향해서 놀리듯이 흉내를 내면서 툭 치고 퇴장한다. 하지만 원작에는 ‘형사가 조련사의 어깨를 툭툭 친다. 비둘기처럼 날다가 거위 소리를 내고 원숭이 흉내를 내며 한 바퀴를 돌고 나간다.’ 이렇게 나와 있으니 동물흉내 또한 조련사를 향해서 하는 것이다. 그럼 왜? 연출은 조련사를 하는 걸로 정하고 몇 가지 동작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의사를 빙 돌아서 갔기 때문에 퇴장 동선이 다소 길었는데 지금은 간결해졌다. 근데 조련사를 상대로 흉내를 내려면 뭔가 동기가 필요한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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