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23-2)

졸업생 공연일지

by 생각의 변화

0221MBTI


형사가 등장한다. 나 역시도 대사를 외웠지만 시선처리와 동선을 신경 쓰느라 대사를 자꾸 잊어버린다. 장면을 만들면서 보니 세세한 부분들이 조금씩 신경에 거슬린다. 일단 연습장소의 책상의 길이가 너무 길다. 의자의 팔걸이도 자꾸 걸리적 거린다.

“그런데 형사가 퇴장하면서 비둘기, 거위, 원숭이 흉내 내잖아? 이거 왜 하는 거냐? 나도 잘 몰라서 묻는 거야” 선규가 묻는다.


청우극에서는 형사가 의사를 향해서 놀리듯이 흉내를 내면서 툭 치고 퇴장한다. 하지만 원작에는 ‘형사가 조련사의 어깨를 툭툭 친다. 비둘기처럼 날다가 거위 소리를 내고 원숭이 흉내를 내며 한 바퀴를 돌고 나간다.’ 이렇게 나와 있으니 동물흉내 또한 조련사를 향해서 하는 것이다. 그럼 왜? 연출은 조련사를 하는 걸로 정하고 몇 가지 동작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의사를 빙 돌아서 갔기 때문에 퇴장 동선이 다소 길었는데 지금은 간결해졌다. 근데 조련사를 상대로 흉내를 내려면 뭔가 동기가 필요한데…… 배우들의 동기는 일단 대본에서 찾아야 한다. 형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형사의 머릿속에 입력된 사건의 개요는 이 대사 속에 있다.


형사 비둘기가 떼로 날자 거위가 꽥꽥대고 그 소리에 놀라 코끼리가 달렸다? 이솝우화네.


형사 입장에서 보면 조련사는, 적어도 요 때까지는, 이솝우화 수준의 허무맹랑한 진술을 하는 덜떨어진 놈이다. 그러니 다시 취조실로 들어온 조련사를 보면서 장난이나 쳐볼 생각에 이솝우화의 주인공들을 하나씩 불러내 흉내 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선규는 비둘기, 거위, 원숭이 흉내를 내고, 어설픈 원숭이 흉내에 조련사가 갸우뚱하면 형사가 섀도우 복싱을 하면서 조련사를 장난치듯 툭툭 치도록 요구했다. 의사는 이 모습을 보면서 앞서 가상의 매직미러(취조실 유리)를 보며 섀도우 복싱을 하는 모습과 연관지어 “폭력가능성 농후함” 이라는 대사를 하게 된다. 이 부분은 예전에 의사를 툭 치고 가는 것보다 좀 더 대사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덧붙여 다시 형사가 등장할 때 조련사를 더 이상 덜 떨어진 ‘참고인’이 아닌 주도적인 ‘피의자’ 신분으로 생각하면서 대하는 것과 잘 대조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결국 문제는 내가 이걸 잘 살리는 것이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흘러가고 은하가 연습 장소에 도착한다. 오늘의 연습이 끝나고 나는 친구들에게 수필문학상 수상 기념 턱을 내기 위해 약속장소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복에게 전화를 한다. 술 마시고 여자 친구에게 전화하는 것처럼. 별로 할 말도 없으면서 괜히 연습은 잘 끝났는지 묻는다. 성복이도 내가 취한 걸 눈치챈 것 같다. 이상하게 오늘 연습은 별로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 대사는 외웠지만 연기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랄까. 다음날 일어나서 전날 성복이가 얘기해준 대로 킨들앱을 다운로드 받는다. 아마존에서 서머싯몸의 희곡을 전자책으로 구입해 보기 위해서다. 종이책을 주문했더니, 맙소사! 6월 10일에서 9월 22일 사이에 온댄다. 문자 그대로 범선에 Shipping을 해서 보내는 건지 아니면 돌고래의 Swimming에 의지해서 오는 건지. 종이책 주문을 취소하고 전자책으로 구입한다. 아이패드로 보면서 모르는 문장은 챗지피티를 돌리니 너무 편하다. 범선과 돌고래는 이제 안녕. 아침에 일어나서 <summing up>을 읽는다. 한창 희곡을 쓸 당시의 이야기를 읽는 중이다. 한때 그의 희곡 네 편이 동시에 런던에서 상연됐다고 한다. 당시에 <펀치>에는 셰익스피어가 서머싯몸의 연극 광고판 앞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고 있는 카툰이 실렸다고 한다. 책 속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I like a theater best when it is under dust-sheets, the auditorium in darkness, and the unset stage with the flats stacked against the back wall is lit only by footlights.

(나는 극장이 먼지 덮개가 씌워져 있고, 객석은 어둠에 잠겨 있으며, 뒷벽에 평면 무대장치들이 포개 세워진 채 아직 세팅되지 않은 무대가 풋라이트만 비치고 있을 때가 가장 좋다)


2000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해서 연출할 때 극장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아직 아무도 없는 무대를 바라보곤 했다. 무대 위를 청소하고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수십 번을 봤던 내 연극인데도 괜히 설레고 모든 게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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