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일지
0228 더 플러머(plumber)
이번 주 연습을 끝으로 다음 주는 방학이다. 연출의 계획은 엄마-조련사 장면 이후의 동선을 완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3월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월요일엔 아주 기쁜 소식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공연 장소를 확보한 것이다. 선배 병원 건물 지하에 있는 소극장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되는 것이면서 안정적이고 확실한 연습 장소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아마추어들의 경우 4회 공연을 한다고 했을 때 무대 설치하고 동선에 적응하려면 최소 열흘 이상은 대관을 해야 한다. 극장마다 대관 비용이 다르지만 십 년 전 기준으로도 수백만 원이 넘게 든다. 3월에는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장소에서 연습을 하게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신나는 일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늘 친구처럼 붙어 다니는 인생처럼 일주일 동안에도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도 있는 법. 한 달 가까이 속을 썩이던 병원 배관 문제의 원인이 드디어 밝혀졌다. 그동안 관리소장은 한파 때문에 얼어서라고 주장하면서 병원 아래층 천정을 뚫어서 배관 막힘의 원인을 확인하는 걸 반대했다. 하지만 한파는 끝났고 빌딩 내의 다른 사업장들은 배관에 전혀 문제가 없으니 결국 우리 병원 내 배관의 문제인 것이다. 소장과 약간의 말다툼과 신경전 끝에 결국 일과시간이 끝난 후에 건물 1층 외래 천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전에 연락했던 업체 연결해서 배관공을 불렀다. 야구캡을 쓰고 하얀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옷을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와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가 서양 사람처럼 오똑한 동료가 같이 왔다. 일단은 예전에 왔던 사람들이 아니어서 실망했고 어리고 자신감이 부족해 보여서 신뢰가 가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무뚝뚝해서 답답했다. 일단 2층 우리 병원에 샤프트를 넣어서 트랩(아래쪽에서 악취가 올라오지 않도록 관이 꺾이도록 만든 부분)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트랩을 열 계획이었다.
“1층 외래가 아니라 그 옆의 옷가게 천정을 열어 봐야 돼요”
삼십 분 정도 점검을 하고 난 후에 야구캡을 쓴 배관공이 말했다.
“그럼 오늘 안 돼요. 옷집 사장님께 내일 연락하고 하세요.” 관리소장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불만스게 대답했다.
다음 날 옷가게에 들렀다. 폐점세일 하는 옷들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곳이어서 장소는 넓고 옷은 많았지만 직원은 딱 한 명이었다. 단정하게 화장을 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직원이었다. 우리 병원 배관문제 때문에 작업 장소에 전시된 신발을 치우고 그 위를 비닐로 덮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 미안해서 겸사겸사 형사 복장으로 적당한 것이 있나 살펴보았다. 마침 수염을 열흘째 기르고 있어서 적당히 어울리는 걸 찾기 좋은 시기인 것 같았다. 갈색 가죽자켓이 맘에 들어서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는데 선규는 옷이 좀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했다. 고민하다가 결국 사지 않았다. 내가 올린 사진을 보고 수염은 그 정도보다 조금 짧게 기르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아, 드디어 면도.
그날 오전 내내 다른 배관공을 부를까 고민하다가 결국 같은 사람을 불렀다. 누구에게나 경험을 쌓는 시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옷가게 영업이 끝나는 7시 30분에 왔고 옷가게 천정에서 트랩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라인더와 전기톱으로 천정 석고보드를 잘라서 몸이 들어갈 공간을 확보했다. 고압세척기를 이용해서 작업을 했지만 야구캡 배관공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담배를 피면서 뭔가를 상의하더니 건물 1층 복도 쪽 천정을 열어서 그쪽에서 고압세척기로 작업을 시작했다. 관리인(어제와 다른 분이다)이 배관공들이 조금 경험이 부족한 것같다고 했다. “그래도 맡겼으니 믿고 지켜봐야죠.” 그는 이미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공사 마무리를 보고 가야 해서 남아 있는 것이다. 경험이 없던 이들에게 맡겼던 걸 후회하고 있던 내 마음을 들킨 것같아서 살짝 찔렸다.
“거의 뚫린 것 같은데 2층 병원에서 세탁기를 돌려서 확인을 해봐야겠어요” 자정이 되기 이십 분 전 즈음에 동료가 내게 말한다.
세탁기에 물을 가득 담아서 두 번을 내보냈고 드디어 배관이 뚫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려와서 보니 야구캡 배관공의 표정이 밝아졌다. 공사비용을 조금 깎았음에도 ‘사실 더 받아야 하는데’라고 말을 흐린다. 여전히 표정이 밝다. 거의 새벽 한 시가 다 돼서 집에 도착했다.
수요일 줌리딩 때는 엄마-조련사 장면이 끝나고 난 이후를 두 번 읽었다. 이번 주 계획이 이 부분의 동선을 긋는 것이어서 최근에 여기를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 부분의 흐름이 좋다. 아마도 그렇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조련사의 대사 처리가 안정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정도의 리딩이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짜보면 좋은 동선이 나올 것 같다. 토요일 연습이 기대된다.
낙근이 주말 당직이어서 토요일 낙근의 병원에서 연습을 하기로 했다. 은하가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우선 의사 형사 조련사가 나오는 앞 장면을 연습했다. 선규는 조련사의 리액션을 꼼꼼하게 교정하며서 동선을 짰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은하로부터 연락이 온다. 딸이 장염이 있어서 병원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늦게라도 오겠다고 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말을 참 오랜만에 한다, 역시 계획은 계획일뿐. 선규는 뒷부분 동선을 짤 수 없는 걸 아쉽게 생각했지만 금세 계획을 바꿨다. 은하가 나오지 않는 나머지 장면을 모두 만들기로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장점도 있다. 의외의 웃음 포인트가 생긴 것이다. 바뀐 캐스팅에서는 조련사가 제일 덩치가 크고 의사가 제일 작아서 동료에게 달려드는 조련사를 제지하는 장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의사가 조련사를 정면에서는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조련사를 뒤에서 덮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업히게 되고, 그 과정이 웃음 포인트가 됐다.
9시가 조금 넘어서 연습이 끝났다. 치맥을 하기 위해서 근처 치킨집에 들어간다. 손님이 바글바글 하다. 반반치킨과 맥주 4잔과 소주 한 병을 시킨다. 안주를 두 개 더 시켰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기억나는 것 중에 한가지는 공연을 하게 되면 작가를 초대하면 좋을 것 같다는 거였다. 30년 전에 <지킴이>를 공연했을 때 작가인 정복근씨가 공연을 보러 왔던 게 기억났다. 당시에 따로 연락을 드린 적이 없었는데 작가가 스스로 알고 찾아온 것이다. 같이 따라온 평론가-뿔테 안경을 쓴 까칠한 인상의 여자였다- 말에 따르면 정복근씨는 아마추어 극단이든 프로 극단이든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는 걸 보러 다니는 걸 즐긴다는 것이다. 참, 정복근 씨가 여자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