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일지
0228 더 플러머(plumber)
선규는 연습을 하기 전까지 모든 배우들의 연기를 상상해 본다고 했다. 낙근은 <신이국기>를 하던 시절에 연습하는 날 아침에 모든 배우들의 연기를 한 번씩 해보고 장면을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연출을 했을까? 적어도 둘처럼 연기를 해보진 않았던 것 같다. <지킴이>를 만들 때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 때는 끊임없이 다른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상상했던 것 같다. 사실 그건 요즘도 가끔 하는 상상이기도 하다.
“형, 적어도 다음 연극할 때 멤버 네 명은 확보됐네요.” 같이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성복이 말한다.
“또 하려구?” 내가 묻는다.
“이번에 잘 되면 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형이 각색하면 그걸로 하죠.” 성복이 말한다.
“하긴, 내가 쓴 거면 내가 연출을 해야지.” 어,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이상하게 성복이랑 얘기하면 말린다. 너무 많이 마셨어.
다음 날 우린 국립극장에서 하는 <더 드레서>를 보기로 했다. 은하가 얘기를 해준 게 마지막 공연 나흘 전이어서 급하게 예매를 하느라 그리고 마지막 공연이어서 2층 맨 뒷 좌석 말고는 남은 게 없었다. 낙근과 준용을 제외한 나머지 넷이 보기로 했는데 은하는 딸의 상태를 봐서 오겠다고 했다. <더 드레서>는 내가 좋아하는 여러 요소를 갖추고 있다. 일단 셰익스피어 작품이 소재이고, 리어왕 연극을 준비하는 ‘선생님’과 그를 돕는 드레서 ‘노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극중극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역시 적당한 함량의 코미디.
박근형(선생님)-송승환(노만)-송옥숙(사모님) 배우의 출연진은 아마도 마지막 공연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은하의 말처럼 올해 86세인 박근형 배우는 극 속의 ‘선생님’과 한사람인 것처럼,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고 움직였다. 나는 엉뚱한 곳에서 빵 터졌다. <리어왕>에서 선생님이 코델리아 역인 사모님을 업는 걸 자신 없어 하는 장면에서였다. 전날 낙근이 성복에게 업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성복이는 노만이 “요”와 “배우”를 말하는 장면에서 빵 터졌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성복과 은하는 너무 좋았다고 했고 나와 선규는 나쁘진 않았지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선생님이 노만을 자서전에 언급하지 않은 동기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선생님의 죽음이 조금은 인위적인 마무리처럼 느껴져 아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1942년 영국의 분장실을 살려낸 정성스런 무대, 깔끔하고 효율적인 동선이 그런 아쉬움을 싹 잊게 만들었다. 단톡방에 올렸듯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한 끼를 먹고 온 기분이 드는 연극이었다. 그리고 이 연극은 묘하게도 내가 이번 연극을 하는 동안 궁금해하는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계속 던진다. 공습경보가 울리고 폭격으로 극장이 파괴되고, 배급을 받을 정도로 경제가 궁핍한데 왜 우리가 연극을, 셰익스피어를, 배우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어쩌면 맷지의 대사처럼 “저건 병이에요. 덧없는 희망” 일수도 있다. 그건 모두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드레서>의 배우들은 연극을 한다. 우리도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매일 모든 배우들의 동선을 상상하는 선규처럼, 오래전에 모든 배우들의 연기를 아침에 한 번씩 해보고 연습을 하러 나왔던 낙근처럼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연극을 연습 중이다.
나는 이번 주 초에 만났던 두 명의 배관공들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의 은근한 불신과 미심쩍어하는 시선 그리고 비협조적인 작업 환경에 불평하지 않고 뚝심으로 밀어붙여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뚫지 못하면 비용을 받지 못한다) 그들을 보면서 존경심 비슷한 게 생겼다. 어쩌면 그들에게 치른 비용은 그들과 다섯 시간 가까이 같이 있으면서 배운 수업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비록 조금 깎긴 했지만). 하루 연습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넘게 ‘뚝심’ 있게 한다면 뭔가 바뀌지 않을까. 비록 우리가 리어왕이나 코델리아는 아닐지라도. <더 드레서> 속의 광대 제프리처럼 “오늘 참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 나이에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것 같아서요.” 같은 대사를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셰익스피어와 서머싯몸이 내 연극을 보러 오는 꿈이나 꿔야 겠다. 이런, 말이 안 통하는구나. 그럼, 그걸 소재로 희곡을 한 편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