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28-2)

연습일지

by 생각의 변화

0328 첫 런쓰루


그리움들이 얼마나 눈처럼 내려야 그 봄날이 올까

-BTS의 <봄날>중에서-


일요일 오후에는 아내와 같이 형사 의상으로 쓸 카키색 점퍼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선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식탁 의자에 베개를 세워놓고 조련사라고 상상하면서 블로킹을 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련사와 형사 둘만의 장면이고 조련사는 형사의 움직임에 의해서 동선이 결정되기 때문에 같이 상의하고 짜야 할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일요일 낮에 짰던 블로킹을 월요일 점심 시간에 진료실에서 다시 해본다. 가물가물. 다시 화요일도 반복. 목요일 정도 됐을 때는 어느 정도 블로킹이 몸에 익는다. 몇 군데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왠지 전보다 나아진 것 같다. 금요일에 성복에게 몇 가지 고친 동선을 알려주었다.


수요일 줌리딩은 동료가 등장하는 장면부터 끝까지 읽었다. 대사를 외우면서 대본의 세세한 지문들을 등한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대본을 보면서 읽었다. 그냥 지나치거나 잊고 있던 지문들도 확인하고 대본을 좀 더 꼼꼼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형사는 전체적으로 목소리 피치를 의도적으로 조금 낮췄다.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보다는 좀 더 무서운 형사 쪽에 무게를 두고 연기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하는 마동석 스타일의 형사를 요구하지만 내가 그게 될까? 어쨌거나 구수한 형사보다는 거친 형사 쪽이 좀 더 지금 내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은하는 아직 목소리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서 쇳소리가 났다. 선규는 뒷부분 리딩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만족한 것 같았지만 동선이 명확하게 안 떠올라서 그런지 나는 전체적으로 형사가 속한 그림이 흐릿하고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교회에서 3시 30분쯤 모였다. 책상과 의자를 옮겨서 무대 공간을 만들고 오랜만에 스트레칭을 했다. 앞으로는 간단하게라도 발성연습과 안면근육 풀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장면부터 시작하는 동안 나는 내가 연습했던 블로킹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다가 연습한 대로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 무렵 내 첫 대사 “잘 진행되시나?”를 뱉는다. 이 장면에서는 항상 의사와 어떤 교감이 없는 것 같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사실 대본에서 보더라도 둘이 별로 서로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도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형사가 첫 번째 퇴장하는 장면에서 나는 연출과 했던 약속인 옷이 날개가 되는 연기를 보여준다. 저번 주말에 카키색 점퍼를 구입했다. 연습을 하다 보니 비둘기를 흉내내는 마임에서 점퍼를 퍼덕거리면 부시럭거리는 소리도 나고 모양도 괜찮을 것 같아서 농담처럼 얘기했던 건데 적어도 그냥 손으로 날개 모양을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형사의 두 번째 등장이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형사 장면이 시작된다. 의사의 대사를 들으면서 내가 만든 동선을 떠올려보지만 잘 안 떠오른다. 에잇, 그냥 첫 대사나 잘 하자.


동선이나 대사를 잊어버려서 내가 중간에 몇 번 끊었다가 다시 했을 뿐 선규는 장면을 되도록 끊지 않고 흘러가도록 둔다. 조련사를 손가락으로 찌르고 팔꿈치로 건드리고 담배로 지지고 헤드락을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단지 의자 하나가 없을 뿐인데 연기 하기가 좀 더 편하다. 내가 준비한 옷이 날개가 되는 클라이막스는 형사가 입은 점퍼를 벗어서 조련사에게 던지는 장면이다. 원래 청우극에서는 내가 시도한 부분보다는 앞쪽에서 훨씬 더 장난치듯이 했다. 나는 그보다는 좀 더 위협적으로, 물론 관객들에게는 그것도 웃기게 보이겠지만. 보이고 싶었다. 일단 겁을 먹은 조련사의 눈에는 형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제삼자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선규는 옷을 던지는 타이밍이 좋았다고 했다. 어쨌거나 오늘은 새로운 블로킹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나의 메타인지(와! 이거 언제 끝나냐?)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어서 동료 장면과 마조히즘 장면이 이어진다. 은하는 진료를 마치고 이때 도착한다. 낙근의 신음 소리는 오늘따라 더 새되게 들리고 급기야 형사와 엄마가 등장해서 대사를 할 때는 헬륨가스를 들이마신 듯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를 해서 다시 한번 모두 뒤집어진다.


“큰일인데, 이러다가 관객들이 의사만 나오면 웃겠어” 선규가 말한다.

이후에도 똑같은 장면에서 웃고 또 웃고. 다음날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우리가 전날 너무 신나게 연습을 하길래 한번 내려와서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는데 아마도 이 장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보셨으면 무척 당황하셨을 듯. 안 보셨길래 망정이지.


은하는 여전히 목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대사들이 날아가고 뭉쳐진다. 선규는 구연동화 하듯이 하지 말라는 지적을 반복해서 한다. 엄마 조련사 장면을 넘어서 우리는 마지막 장면을 향하고 결국 코끼리 쇼 장면에 도달하면서 연습을 마친다. 연습을 시작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 돌린 실제적인 첫 런쓰루인 셈이다.

9시가 거의 다 돼서 연습이 끝나서 저녁도 해결하고 술도 좀 마실 겸 근처 치킨집에 들어간다. 술과 안주를 시키고 첫 런쓰루를 자축한다.

“원래 계획은 연극반 단톡방에 올리고 시끌벅적하게 하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낙근이 말한다.

약속은 깨지라고 계획은 바뀌라고 그리고 진실은 왜곡되라고 존재하는 것. 다시 얘기하지만 계획은 계획일뿐.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계획만이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는 우리 연극의 유일한 계획 아니었던가.

“초반에만 반짝 그럴 거야. 결국 10월이 되면 아는 사람들의 조용한 응원 속에서 연극하게 될 거야” 선규가 말한다.

나도 선규의 생각과 같다. 우리는 저번 주에 컴백한 BTS가 아니니까. 그냥 연극을 그리워하는 중년의 의사들일 뿐.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우리가 만든 <그게 아닌데>를)" -BTS의 <봄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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