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29-1)

연습일지

by 생각의 변화

0404 배우 수업


우리는 그것을 쪼개서 한 조각씩 별도로 소화해 나가야 한다.

-<배우수업>중에서-


세광은 기획이 한두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졸업생 모임에 70년대 학번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있으니 혼자서 모두 감당하기가 조금 벅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명에게 기획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물었지만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세광이 96년에 연출을 했던 연극 <인어전설>에 신입생으로 참여했던 진영이 기획을 선뜻 하겠다고 했다. 세광은 자신이 꼼꼼한 성격이 아니어서 그 부분을 보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의 진영은 그런 점에서 딱이었다. 낙근-나-성복처럼 은하-세광-진영도 3년 터울로 연결돼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번 주 연습이 끝난 후 뒷풀이에서 낙근이 말했다.

“예전에 <배우수업>에서 읽은 얘긴데. 배우는 감정에 깊이 몰입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기술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해.”

“메타인지가 필요하다는 얘기네요.” 내가 말했다. 내게 메타인지가 느껴지는 순간은 대개 ‘이거 언제 끝나냐?’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연관돼 있을 때뿐인데 그게 연기를 하는 동안 항상 작동할 수 있을까. 다음날 문득 <배우 수업>이 읽고 싶어졌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첫 연극이 끝난 후에 읽었지만 지금은 아무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뜬구름 잡는 얘기가 많았고 무엇보다 세로쓰기여서 읽는 것 자체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전에 주문한 책을 저녁에 받았다. 원래는 읽고 싶은 부분을 몇 군데만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비록 앞으로 횟수로는 26번 정도의 연습이 남았지만 기간으로 보면 6개월도 넘게 남았다. 학생 때처럼 두 달 동안만 연습한다면 대본을 읽기도 빠듯하겠지만 6개월이 남았다면 좀 더 연기에 필요한 루틴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수들은 발성연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연주자는 매일 규칙적으로 악기를 연습하고 마라토너들은 중장거리를 꾸준히 뛰면서 풀코스를 준비한다. 공연을 6개월 앞둔 아마추어 배우는 뭘 할 수 있을까?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전에 장편소설을 쓸 때는 규칙적으로 두꺼운 창작론을 조금씩 읽었다. 비록 매일 읽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은 읽으려고 노력했다.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생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장편소설이라는 대장정을 마치기 위한 몸과 머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배우 수업>을 읽기 시작했다. 연기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점검하고 배우의 감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배우수업>은 스타니스랍스키가 쓴 사실주의 연기론에 관한 책인데, 연출가 토르초프가 주인공 코스챠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보여준다. 토르초프의 가르침 속에 스타니스랍스키가 생각하는 사실주의 연기론이 담겨있다. 읽다 보면 예전에 연극반 선배들에게 들었던 얘기들이 대부분 사실주의 연기론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행히도 책은 읽을만했다. 번역은 여전히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꽤 있고 편집상태는 거칠지만 이 책이 전달하고자 내용만큼은 주옥같다. 토르초프는 진실한 감정과 절제된 행동을 강조하면서 판에 박힌 행동이나 과장된 연기를 경계한다.


하지만 코미디에서도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 코미디에서는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정형화된 행동이나 과장된 감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코미디에서는 무엇보다 웃음이 중요한 거니까. 어차피 이론이라는 것이 절대 진리도 아니고 신성한 도그마도 아닌 것이니 필요한 부분만 받아들이면 된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스타니스랍스키는 동시대의 작가 체홉과의 협업으로 사실주의 연극을 꽃피웠는데 그와 ‘희극’의 문제로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체홉은 스타니스랍스키가 자신이 쓴 희극 <벚꽃 동산>을 비극으로 연출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체홉이 생각하는 코미디는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대체 누가 <벚꽃동산>을 체홉이 원하는 수준의 코미디로 연출할 수 있을까.


수요일 줌리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선규의 요구대로 상대방의 대사를 잘 듣기 위한 연습을 하자는 차원에서 눈을 감고 리딩을 했다. 어머니는 아직 목소리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의 톤은 여전히 안정적이었고 조련사는 형사와의 장면에서 몇 군데에서 엉뚱한 대사를 했다. 비슷한 상황과 비슷한 대사가 많으니 헷갈렸던 것 같다. 형사는 위협과 회유의 변화가 잘 살지 않고 큐가 늘어지면서 낮에 반주로 술을 한두 잔 먹은 동네 아저씨같이 들린다고 했다.


<배우수업> ‘단위와 목표’ 챕터에서 읽은 것을 참고해서 목요일엔 형사가 등장하는 장면을 좀 더 세분화 된 ‘단위’로 나눴다. 1. 의사를 쫓아내고 2. 말과 험악한 분위기로 은근히 협박하던 것에서 3. 밧줄과 담배로 직접적으로 협박한다. 4. 회유해서 정치적인 배후를 밝히려 하지만 실패하고 5. 극단적인 수단인 고문(물론 공갈이지만)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각 단위에서 사용하는 행동들을 겹치지 않게 조정하고 감정의 정도를 너무 강함 일변도가 되지 않도록 조정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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