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닌데(29-2)

연습일지

by 생각의 변화

0404 배우 수업


수요일 줌리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선규의 요구대로 상대방의 대사를 잘 듣기 위한 연습을 하자는 차원에서 눈을 감고 리딩을 했다. 어머니는 아직 목소리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의 톤은 여전히 안정적이었고 조련사는 형사와의 장면에서 몇 군데에서 엉뚱한 대사를 했다. 비슷한 상황과 비슷한 대사가 많으니 헷갈렸던 것 같다. 형사는 위협과 회유의 변화가 잘 살지 않고 큐가 늘어지면서 낮에 반주로 술을 한두 잔 먹은 동네 아저씨같이 들린다고 했다.


<배우수업> ‘단위와 목표’ 챕터에서 읽은 것을 참고해서 목요일엔 형사가 등장하는 장면을 좀 더 세분화된 ‘단위’로 나누고 목표를 정했다. 1. 의사를 쫓아내고 2. 말과 험악한 분위기로 은근히 협박하던 것에서 3. 밧줄과 담배로 직접적으로 협박한다. 4. 회유해서 정치적인 배후를 밝히려 하지만 실패하고 5. 극단적인 수단인 고문(물론 공갈이지만)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각 단위에서 사용하는 행동들을 겹치지 않게 조정하고 감정의 정도를 너무 강함 일변도가 되지 않도록 조정했다.


토요일 교회에 모였다. 원래는 첫 주를 쉬는 주로 하기로 했다가 낙근이 본인이 당직인 주를 쉬는 게 낫겠다는 제안을 해서 이번 주 연습을 하기로 했다. 선규 낙근 나 성복 넷이 모였다. 몸을 풀고 발성 연습을 마친 후 우선 내가 마지막 부분에서 조련사를 취조해 자백(?)을 받아내는 장면의 동선부터 했다. 원래 짰던 동선은 테이블에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있는 것이었지만 적당한 큐를 잡아서 앉아 있는 조련사를 가로지르는 동선을 만들었다. 동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압박 일변도에서 벗어나서 압박-추리-회유로 변화시켰다. 감이 변해야 동선이 생기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몇 번을 반복하면서 수정한 끝에 동선을 완성했다. 전체적인 동선이 너무 구석으로 쏠려 있는 느낌이었지만 선규는 전보다 좀 나아진 것 같다고 했다. 다음은 형사가 밧줄로 테이블을 내려치는 장면인데 선규는 내가 짜온 조련사 눈앞에서 테이블을 내려치는 동선보다는 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등 뒤에서 내려치는 장면이 낫다고 했다. 성복에게 물으니 실제로 뒤에서 내려치는 게 더 공포스럽게 느껴진다고 했다. 전에는 뒤에서 어슬렁거리는 동선이 불필요하게 긴 것 같아서 문장의 마지막에 쓴 긴 ‘서술어’처럼 군더더기라고 느껴졌는데 막상 조련사가 실제로 공포를 느낀다고 하니 생각이 바뀌었다. 공포를 느끼는 조련사를 즐기면서 어슬렁거리면 되는 것이다.


연습을 하는 중간에 준용이 왔다. 이제 슬랩스틱의 시간이다. 동료가 등장하고 조련사의 변태성욕(?)을 고발하고 조련사는 동료에 덤벼든다. 한 번, 두 번. 두 번째 덤볐을 때 의사가 조련사를 말리는 과정에서 바지가 벗겨진다. 바지가 벗겨지는 장면은 원래 대본에는 없지만 <마트로시카>를 본 후에 각성한 성복이 벗겨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만들어진 장면이다. 사실 저번 주에 처음 진짜 벗겨졌을 때는 깜짝 놀랐다. 진짜 벗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낙근과는 미리 얘기를 했다고 했다. 저번 주엔 벗기는 큐를 완벽하게 잡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완벽한 타이밍에 그리고 완벽하게 벗겨졌다. 나는 동료인 준용을 보고 있고 준용은 내 등 뒤의 성복을 보고 있는데 표정이 영 불안하다. 뒤돌아서 보니 성복의 팬티가 조금 이상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복의 상의가 길게 내려와 있어서 마치 팬티가 진짜로 벗겨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연기가 아니라 사고다. 다행히도 팬티는 입었는데, 헉, 근데 이거 공연용 팬티가 아니잖아. 저번 주엔 흰색 사각 트렁크 팬츠였던 것 같은데 오늘은 딱 붙는 파란색 드로우저이다. 그게 아닌데. 개콘 ‘발레리노’도 아니고 컨셉을 바꿨나.


“원래 이 팬티 아니지 않니?” 내가 묻는다.

“오늘 이 장면 연습할 줄 몰라서 다른 팬티 입고 왔어요” 성복이 대답한다.

“어머, 얘 보기 흉해. 빨랑 입어.” 막 도착한 은하가 손차양으로 시야를 가린 채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다.

이후에도 성복의 파란 드로우저를 두 번 정도 더 보았다. 나는 가족 모임이 있어서 먼저 가야 했기 때문에 모두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의 동선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점점 나아지는 것같은 느낌이다.


다음날 낙근이 어머니-조련사 장면 영상을 여섯 개로 나누어서 올렸다. 두 번 연습한 걸 올렸는데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나았다. 은하의 목소리는 아직 백퍼센트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얘기한 것처럼 첫 등장에서 어머니가 준비한 찬합이 좀 신선하고 코믹하게 등장하면 좋을 것 같았다. 관객의 허를 찌르는 웃음이었으면 했다. 그리고 이번 주에 읽은 <배우수업>을 참고해서 어머니도 10분 정도 나와서 둘이 앉아서 하는 장면을 좀 더 쪼개서 ‘단위’를 만들고 단위들의 ‘목표’를 설정해서 변화를 만들면 좀 더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전에 선규가 말했던 문장을 후루룩 말하지 말고 문단을 나눴으면 좋겠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인지도 모른다. 문장이 아닌 연기 전체로 확대해보면 비슷한 얘기다.


관객들은 연기를 통째로 느끼지만 배우들은 그것들을 조금씩 조각내서 갈고 다듬어 보여주어야 한다. <배우수업>에 나온 비유처럼 우리가 칠면조 한 마리를 먹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각내고 소스를 뿌리고 접시에 담아서 먹어야 한다. 관객들 또한 칠면조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 게 아니라 적당한 크기로 잘라지고 적절하게 양념이 된 칠면조를 예쁘게 플레이팅한 상태에서 먹기를 원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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