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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l 17. 2020

셰익스피어-우리의 동시대인

왜 셰익스피어인가?


  왜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읽는가? 왜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세상을 뜬 지 벌써 400년이 넘은, 지구 반대편 서양의 작가일 뿐인데 말이다. 그가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한국의 역사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그가 한창 극작에 몰두하던 1600년대 초반은 조선 땅에서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현대의 한국 독자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오랜 옛날의 작가이어서 그가 쓴 희곡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고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셰익스피어가 언급되고, 그의 작품들이 공연되고, 많은 평자들이 그에 대해 연구를 거듭하는 것은, 그가 서양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국인들이 근대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셰익스피어를 문화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여기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왜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이야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문학이라는 예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물음이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2,500년 후의 문학은 어떤 모습일까? 물론 그때까지 지구가 존재하고 그 위에 사는 인간들이 여전히 문학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의 이야기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2,500년 전의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는 서양문화의 진원지였다. 그 시기 그곳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이 있었고,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 그리고 의학의 창시자 히포크라테스가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들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수학자였다. 서양의 철학과 역사와 과학이 꽃 피던 그 놀라운 시절의 문학은 어떠했을까? 2,500년 전 그리스인들이 가장 즐기던 오락은 연극이었다. 그들은 거대한 야외극장을 짓고, 그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가면을 쓴 채, 과장된 몸짓과 함께 큰 소리로 대사를 말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 무대를 보며 열광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연극은 하나의 축제였고, 그것을 위해 많은 작가들이 연극의 대본인 희곡을 써냈다. 그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서 당시의 희곡(문학으로서)이 어떤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작가들이 서양 희곡의 원형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가멤논 왕과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의 갈등을 그려낸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딸을 제사의 희생물로 바친 남편에 대한 증오로 왕비는 그의 정부와 함께 왕을 살해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복수로 이어지는 그 작품은 당시의 관객들에게 오락적인 재미와 함께 인간의 본성인 욕망, 증오, 복수심 등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상황을 그리고 있으며, 그것은 정신분석학의 시조라 불리는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의 배경이 되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the wheel of fortune)를 실감하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의 비극을 ‘운명의 비극’이라 부르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더욱 격정적이다. 그의 작품 ‘히폴리투스’는 새어머니 페드라가 의붓아들 히폴리투스를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운명을 ‘모이라이’적 운명과 ‘다이몬’적 운명으로 구분한다. ‘모이라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세 여신들이다. 그들은 자매 사이로 첫째 여신은 인간에게 나누어 줄 운명의 실을 잣고, 둘째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맞춰 자르고, 셋째는 그것을 나누어준다고 한다. 따라서 ‘모이라이’적 운명은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인간이 본래부터 갖게 되는 운명을 나타낸다. 한편 ‘다이몬’은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정령에 해당하는 존재로 ‘귀신’이나 ‘악령’ 같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영어의 디먼(demon, 악령, 악마)의 어원이다. ‘다이몬’적 운명이란 자기 속의 무언가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끌어가는 운명을 가리킨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모이라이’적 비극의 전형이라면, 페드라의 비극은 ‘다이몬’적 비극을 보여준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사랑, 남편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본래부터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거부감을 느껴왔던 히폴리투스에게 새어머니가 사랑의 고백을 해올 때, 그의 반응은 당연히 경멸과 혐오뿐이었다. 사랑을 거부당한 페드라는 히폴리투스가 자신을 겁탈했다는 거짓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그 거짓에 속은 부왕에 의해 히폴리투스는 성에서 내쫓기고 마침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계모와 아들 간의 사랑. 놀랍게도 그것은 2,500년 전 문학의 테마였다.  

  ‘격세 유전’(atavism)이란 단어는 생물학적 용어이다. 어떤 유전적 특성이 일정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갑자기 다시 등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문학 작품 속의 주제와 소재도 그러하다. 계모와 아들의 사랑은 가끔씩 문학 속에 등장한다. 20세기 미국 초기 현대연극의 대표적인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도 그런 작품이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한 농장에서 벌어지는 거칠고 인색한 아버지와 세 아들 사이의 이야기이다. 첫째와 둘째 아들은 늘 아버지의 독선과 농장의 힘든 일에서 벗어나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싶어 한다. 막내아들 에벤은 내성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날 아버지는 막내아들 또래의 여성(애비)을 데려와서는 새어머니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그 철없는 젊은 새어머니는 자기 또래의 막내아들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를 유혹한다. 히폴리투스와는 달리 에벤은 정욕과 젊음의 열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아기가 태어난다. 이후 이야기는 더욱 엽기적으로 발전한다. 두려웠기 때문일까?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일까? 아기가 태어난 후 에벤은 애비를 멀리한다. 에벤의 변화에 당황한 애비는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존재가 자신들의 아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결국 잠든 아기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계모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2,500년의 세월을 보낸 후 등장한 이 작품은 사랑의 격정과 정욕이 더해져 더욱 암담한 현실로 이어지고 끔찍한 유아 살인이 벌어진다. 게다가 어머니에 의해 저질러진 자식의 살해는 그릇된 사랑의 정염 때문에 생겨나는 모성의 파괴를 보여준다. 오랜 세월의 흐름이 같은 소재의 묘사를 엄청나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또 다른 작품이 우리를 놀라움에 빠지게 한다. ‘메데이아’의 여주인공 메데아는 사랑을 위해 아버지와 형제까지 버린다. 그렇게 얻어낸 사랑이었지만 남편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그녀와 두 아들을 버리고 떠나간다. 배신감과 증오심에 사로잡힌 그녀는 마침내 가장 끔찍한 복수를 결심하고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해 그 시신을 남편에게 보낸다. 사랑이 초래한 모성의 파괴이다! 절대적인 가치로 믿어왔던 모성의 파괴는 2,500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학 작품 속에서 예언되어 왔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아동학대와 유아 살인의 대부분이 친 부모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며 우리는 문학의 예언적 힘에 대해 생각한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자기 자신과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간을 배운다. 문학만큼 인간의 행동과 본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 초기 인문학의 세 분야, 문학, 사학, 철학 가운데 문학이 가장 앞서 나오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시인이었던 필립 시드니(philip Sidney)는 문학이 사학이나 철학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구체적이지만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보편성이 모자라고, 철학은 보편적이지만 사변적이고 관념적이어서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역사만큼이나 구체적이고 철학만큼이나 보편적이다. 실제 인간의 삶을 역사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철학이 제시하는 보편적인 가치, 인간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그 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독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보편적인 본성과 행위의 동기를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2,500년 후의 문학이 오늘의 문학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그렇듯 긴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삶의 모습도, 가치관도, 우주를 보는 시각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마음, 그들의 기쁨과 슬픔, 욕망과 좌절, 사랑과 배신 그리고 증오의 감정은 여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이라 불리는 과거의 문학 작품들 속에서 오늘의 우리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은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에 있다. 독자들은 스스로 햄릿이, 맥베스가, 오셀로와 샤일록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스트래트포드 어펀 에이븐(Stratford-upon-Avon)이란 마을 주변에는 아름다운 아든 숲과 에이븐 강이 있었다.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지는 자연은 그가 보고 자란 고향의 아름다운 숲과 강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그려낸 인물들도 그가 만났던 많은 평범한 인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양한 모습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독일의 시성 괴테는 “내 삶에 기억되는 어떤 책, 어떤 인물, 어떤 사건도 셰익스피어의 희곡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없다. “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그 보편적인 인물들을 통해서 현대와 대화한다. 그리고 그가 작품 속에 은밀히 던져놓은 이야기들을 통해 오늘의 우리를, 우리가 처한 상황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는 현대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들의 동시대 작가라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을 알고, 세상을 이해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한다. 그렇게 지금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작가라 칭송하고, 그의 작품들을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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