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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l 17. 2020

셰익스피어의 시대와 삶

셰익스피어의 무덤 속 보기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때는 영국의 역사에서 가장 번창하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였다. 장미전쟁에서 백장미를 문장으로 사용하던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새로이 튜더 왕조를 열었던 사람이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사용하는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7세였고, 그의 손녀가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헨리 7세는 왕이 된 이후 젊은 시절의 그 용맹스럽고, 역동적이던 기질을 포기하고 신중하고, 사려 깊은 왕으로 처신하였다. 장미전쟁의 승자였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조부였던 그가 셰익스피어 사극뿐 아니라 당대 희곡 작가 누구의 작품에도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은 제아무리 뛰어난 작가라 하더라도 그의 엄청난 변화의 모습을 한 작품에 그려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중하고 현명한 조치로 왕권을 강화하고 내치를 안정시킴으로써 위대한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의 손녀인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버지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앤 볼린의 딸이었다. 부왕 헨리 7세로부터 안정되고 새로운 영국을 물려받은 헨리 8세는 학문과 예술에 빠져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왕이었다. 또한 쉽게 사랑에 빠지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궁정의 시녀 앤 볼린과의 결혼을 위해 스페인의 공주였던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로마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나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압력으로 이혼 허락을 받지 못하자,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앤에 대한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앤이 잉태한 첫 번째 아이는 아들이었지만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고, 두 번째 낳은 딸이 바로 엘리자베스였다. 결국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한 앤을 간음죄로 몰아 런던탑에 가둔 뒤 처형하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어머니의 죽음을 보며 궁정생활의 비정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헨리 8세의 죽음 이후 왕위를 물려받은 배다른 남동생(에드워드 1세)과 언니(메리 여왕)의 치세 동안 숨 죽여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일찍 세상을 뜨자 엘리자베스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어린 시절 궁정에서의 정치적 음모와 비정한 정략을 터득한 그녀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통치의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처녀로서의 매력과 현명한 처신으로 왕권을 강화시켰고, 영국의 힘을 결집시켜 나갔다. 그녀는 4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왕위에 있으면서 식민지 건설을 통한 무역의 확대로 국민들의 경제적인 삶을 개선하였고,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을 해소하여 종교적 관용의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 영국은 유럽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게 되었고, 영국인들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열정과 모험의 정신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역동적인 시대에 알맞은 예술의 형태는 연극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이 기원전 5세기에 꽃 피워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는 또한 연극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르네상스의 기운이 창궐하던 이 시기에 런던의 곳곳에 로즈(Rose), 스원(Swan), 글로브(Globe) 등 연극 전용극장들이 세워졌고, 그곳에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극단이 생겨나고 궁전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는 극작가들이 배출되었다. 셰익스피어도 그들 중 하나였다. 대중의 기호에 맞는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와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역사와 전설의 이야기들을 기초로 하여 셰익스피어는 화려한 문체와 표현으로 자신만의 극작 세계를 구축하였다.  

  셰익스피어는 1564년 스트래트포드 어픈 에이븐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죽 세공업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문법 학교를 다니던 10대 중반에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자 어린 셰익스피어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부양을 위해 일자리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8세 되던 해에 그는 이웃 마을 농부의 딸인 여덟 살 연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결혼은 행복한 생활로 이어지지 못했고, 20세 중반의 셰익스피어는 가족을 등지고 런던으로 상경한다. 그가 고향을 떠난 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런던의  제임스 버비지(James Burbage) 극단의 단원 명단에 오른 때까지 약 10여 년의 시간은 셰익스피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잃어버린 세월’(missing years)이라 불리기도 한다. 처음에 극단의 배우로 일했던 셰익스피어는 1585년 이래 극작가로서 이름을 알리면서 승승장구하였다. 당시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 출신의 극작가(University Wits라 불림)들은 ‘갑자기 출세한 까마귀’(upstart crow) 같은 자라고 그를 경멸하며 비난하기도 하였다. 당대 문호로 알려진 벤 존슨(Ben Johnson)은 셰익스피어와 관련해 ‘라틴어도 못하고 그리스어는 더 못하는’(small Latin, less Greek)이라고 말했으나 존슨의 이 언급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조롱이라기보다는, 교육적 배경이 부족함에도 관객들을 매료하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찬사라고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는 50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극작을 멈추고 런던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는 개인적인 가정사와 후원자들의 정치적 몰락과도 관계가 있지만 당시는 극작가를 포함해 연극인들이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던 까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셰익스피어의 삶에 대한 이렇듯 짧은 언급은 서양문학의 최고봉에 있는 대문호라는 그의 위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의 영국은 기록보다는 웅변을 위한 수사법이 더 중요시되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기록조차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한갓 극작가의 삶이 특별한 기록으로 남아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부족은 셰익스피어가 실존인물인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당시의 대학 출신 작가들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필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생아란 소문도 있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필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셰익스피어에 실존에 대한 의문들은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 대한 찬사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왜냐면 그러한 주장은 제대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작품들을 써낼 수 있었겠느냐 하는 놀라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고향으로 은퇴한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뜬다. 그가 태어난 날은 1564년 4월 23일이었고, 그가 죽은 날자는 1616년 4월 23일이었다. 사실 그가 태어난 날을 4월 23일로 정한 것도 정확한 기록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고향에 있는 한 교회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의 아이가 세례를 받은 날이 4월 26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 3일 이내에 세례를 받기로 되어있었다는 점에 미루어 학자들이 그의 생일을 4월 23일로 정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날에 대해서는 근거가 더욱 희박하다. 그렇게 셰익스피어의 생애는 추측으로 가득 차 있다. 1616년 4월 23일은 또한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이 위대한 서양의 두 작가를 기려 유네스코는 매년 4월 23일을 ‘세계 책의 날’과 ‘세계 저작권의 날’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날자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작가는 그가 남긴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의 생애에 대한 궁금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남긴 희곡과, 시들은 영원히 살아남아 오늘의 독자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셰익스피어 고향의 교회(성 삼위 교회, Holy Trinity Church)에 그의 묘지가 있다. 그의 묘비명은 위대한 작가의 묘비명으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글귀가 적혀있다.    

Good friend for Jesus sake forbeare,

To dig the dust enclosed here.

Blessed be the man that spares these stones,

And cursed be he that moves my bones.    

벗들이여 부탁하네. 제발 참아주게.

여기 묻힌 것은, 티끌도 파헤치지 말아 주게.   

무덤의 돌 하나 건드리지 않는 자에게 축복이,

내 뼈를 옮기려는 자에게 저주 있으리.    

  왜 그는 이런 멋없는 묘비명을 남겼을까? 하긴 그것이 그의 글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그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묘비명은 아마도 다른 사람의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필자는 그의 묘비명을 대할 때마다 햄릿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오필리아의 장례식에 가던 햄릿이 무덤 파는 인부들이 땅 속에서 꺼내 올린 해골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그 해골의 주인이 어린 시절 궁전에서 보았던 광대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것을 어루만지며 옛날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만일 묘비명을 쓴 이가 셰익스피어 자신이었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져 그의 유골이 드러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묘지는 오랜 세월 세간의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고이 보존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2016년 영국의 한 대학 연구팀이 엄격한 교회를 설득해 그의 무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 무덤 안을 탐색해 본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덤 안 유골 가운데 두개골 부분이 사라졌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19세기 무렵 도굴꾼들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내놓았다. 황당한 주장에 분노한 교회 측은 즉시 연구팀의 발표를 반박하면서 앞으로는 어떤 종류의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연구팀의 주장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더 큰 궁금증만을 유발했을 뿐이었지만, 이 모든 것은 이 위대한 작가에 대한 끝없는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가리켜 흔히 ‘만대의 작가’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바래지 않는 찬란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유려한 문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본질에 대한 그의 예리한 시선은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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