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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l 18. 2020

셰익스피어의 비극

하마르티아-인간의 비극적 결함

셰익스피어는 모두 37편의 희곡을 썼다. 그중 비극과 사극은 각각 10편, 희극이 17편이다. 아무래도 당시 런던의 극장에 모여든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기엔 희극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문학사가 롱(William J. Long)은 셰익스피어가 극작을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 1587년 이래 그의 창작활동을 4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시기는 젊음이 가득하고 상상력이 풍성했던 초기의 실험기로 이때 나온 작품들로는 ‘사랑은 헛수고,’ ‘베로나의 두 신사,’ ‘리처드 3세’ 등이 있다. 두 번째 시기는 급속한 성장과 발전의 시기였다. 보다 예술적인 작품들을 써냈으며 구성도 더욱 발전하였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눈에 띄게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뜻대로 하세요,’ ‘헨리 4세’ 등 현대의 관객들에게 좀 더 알려진 작품들이 등장한다. 세 번째 시기는 셰익스피어가 개인적으로 많은 어려움과 슬픔을 겪었던 시기였다. 가정사에서도 불행을 겪었지만 그를 후원하던 귀족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련의 시간은 그에게 작가로서 가장 성숙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그의 4대 비극 ‘햄릿,’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 등뿐 아니라 ‘줄리어스 시저’가 이때 나온 작품이었다. 또한 사랑의 연작시집 ‘소네트’를 쓴 것도 이때였다. 시련 속에 꽃 피운 예술혼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폭풍 같았던 시련 끝에 회복한 마음의 평화 속에서 나온 말년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빈번히 공연되고 있는 ‘겨울 이야기,’ ‘폭풍’ 등이다. 이후 셰익스피어는 작가로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흔히 ‘성격의 비극’(tragedy of character)이라고 불린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운명의 비극’(tragedy of fortune)이라 부르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그리스 비극 속의 주인공이 운명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는 달리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성격적 결함으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적 결함(tragic flaw)을 고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부른다. 셰익스피어 비극 속의 하마르티아는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인간의 나약함과 추함이었다. 햄릿의 망설임, 맥베스의 탐욕, 리어의 자만, 오셀로의 의심 등이 그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가장 빈번히 드러나는 인간의 비극적 결함은 '휴브리스‘(hubris)라 불리는 어리석은 ’ 자만심‘이라고 생각하였다. 성경에서도 ’ 자만은 패망의 선봉‘(Pride goes before destruction.)이란 구절이 나온다. 무수한 인간의 성격적 결함들은 오늘의 우리들에게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작은 성공에 만족하여 자만심에 빠지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는 것도 그렇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의심하고, 배신하고, 파괴하는 행위들도 과거와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오늘의 우리에게 피해야 할 인간 본성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예술론의 시작이랄 수 있는 그의 책 ‘시학’(Poetics)에서 비극의 목적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궁극적인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행에 빠진 인물에 대한 연민, 그리고 그의 불행이 내게도 있을 수 있다는 공포의 감정이 비극을 통해 순화되고 배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이래로 비극의 주인공들은 왕후장상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높은 위치에 있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불행의 나락으로 빠질 때 그 비극감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데 카시부스'(de Casibus) 효과라고 부른다. 관객들은 그 비극의 주인공과 감정을 이입하고, 그의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마침내 그 감정에서 벗어나 안도감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비극은 단지 슬픔과 고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극은 ‘고통을 통해 배우는 것’(Learning by suffering)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슬픈 것과 비극적인 것을 구분한다. 주인공이 마주친 ‘겪지 않아도 될 운명’(undeserved misfortune), 비극적 결함은 주인공의 고통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세는 신 중심의 세계였다. 사람들은 신이 만든 정연한 우주의 질서를 믿었고, 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의 위계를 신봉했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에서는 왕이, 동물계에서는 사자가, 식물계에서는 장미, 날짐승에서는 독수리 그리고 광물계에서는 다이아몬드가 존재의 사슬에서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수직적인 위계의 좌표는 수평적으로도 연결된다. 그래서 왕의 상징은 사자와 독수리가 되고 왕의 문장에 장미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정연한 질서의 체계를 파괴하는 것, 그것이 중세가 얘기하는 죄의 개념이었다. 맥베스는 왕을 죽임으로써 그 자체로 살인의 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이 부여한 왕권의 질서를 파괴한 종교적 죄를 아울러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리어왕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그는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왕의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고, 마음대로 영토를 분할하여 딸들에게 나누어주는 자만의 모습을 보였고 그것은 질서의 파괴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죽음을 맞이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종종 ‘잔인성의 비극’(tragedy of cruelty)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모두가 선악의 구분 없이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형을 죽인 클라우디스 왕뿐만 아니라 햄릿의 어머니 거투르드, 햄릿이 사랑했던 오필리어,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마침내 햄릿 자신도 죽음을 맞는다. 권선징악이라는 ‘시적 정의’(poetic justice)는 존재하지 않는다. 햄릿은 인간 세상의 복수를 통해 정의를 세우려 하지만, 파괴된 질서에 대한 하늘의 형벌은 질서를 파괴한 클라우디우스를 넘어 햄릿에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극 속의 고통과 죽음은 단지 슬프고 안타까운 세속의 감정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을 통해 더 큰 도덕적 질서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떤가? 우리는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적 결함을 지니고 살아간다. 때론 욕심으로 때론 시기심과 자만으로 그렇게 피폐해 가는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슬퍼한다. 때론 절망하고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우리의 비극은 그저 슬퍼함으로써 끝을 맺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슬픔과 아픔이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는 없을까?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으며 오늘의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피어난 아픈 깨달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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