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84, 디스토피아는 올 것인가?

by 최용훈

1949년에 출판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Nineteen Eighty Four)는 일종의 디스토피안 소설(dystopian novel)이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Utopia)라는 표현의 패러디로 그것과는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유토피아, 이상향. 인간은 언제나 이상화된 세상을 상상하고 염원한다. 플라톤의 '국가‘(Politeia) 이래 인간은 가장 정의롭고, 행복하고, 안정된 세상을 동경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갈망한 세상은 늘 모순으로 가득 찬 절망의 대상이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예술에 대한 그의 편향된 시각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술이 없는 이상적 국가. 그것이 유토피아의 역설인가? 예술에 대한 서양 최초의 표현이 그렇듯 부정적인 것이었음은 아이러니이다.


한 개인이 상정하는 이상향은 그래서 편견과 왜곡에서 자유롭지 못할지 모른다. 16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유토피아’라는 제목의 책을 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16세기 유럽인들의 신세계에 대한 동경을 그려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선박의 발달로 지구상의 곳곳에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어가던 그들에게 있어 새로운 세상은 그들의 이상 속에 나오는 완전한 세계에 대한 염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렇게 새롭고 완벽한 세계가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유토피아라는 말의 어원은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많은 이들을 실망과 좌절로 이끈다. 고대 그리스어로 ‘ou'는 ’없음‘을 뜻하고 ’topos'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써 결국 유토피아(utopia)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포기한 인간들은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세상, 인간의 모든 행위가 감시되고 제약되는 어둠의 세상을 새로이 그려내고 있었다. 오웰이 그려낸 1984년의 세상은 그런 디스토피아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웰이 창조한 세상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소설에서 묘사된 전체주의 정권과 똑같은 정권, 똑같은 상황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1984’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축소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세계가, 현대의 기술이, 정치의 메커니즘이 지니고 있는 위험의 잠재성이 소설 속의 그것보다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소설 속 오세아니아라는 나라의 윈스턴 스미스는 어디를 가든---심지어 그의 집에서 조차도---당에 의해 감시를 당한다. 그 나라에서는 빅브라더라 불리는 전지전능한 지도자가 이끄는 당이 역사와 언어를 포함해 모든 것을 통제한다. 심지어 뉴스피크(Newspeak)라는 이름의 언어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저항’이나 ‘반란’ 따위의 개념과 관련된 모든 낱말을 없애 정치적 혼란을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 더욱이 반란에 대해 생각만 하더라도 범죄로 간주한다. 윈스턴은 자유로운 생각, 섹스, 개인적 표현에 가해지는 통제와 억압에 절망한다. 그의 회의와 좌절, 그리고 은밀한 마음속의 반란은 당의 계략에 의해 드러나고, 결국 고문과 세뇌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까지도 배신하고 당에 대한, 빅브라더에 대한 충성의 인물로 변화된다.


소설 속에서는 사상을 통제하는 다양한 기법들이 등장한다. 그 첫째가 ‘심리적 조작’이다. 심리적 자극을 가함으로써 독립된 생각을 제약하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시민들의 방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시민들은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음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Big brother is watching you.)라는 광고문은 그들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고 위축시키는 심리적 조작으로 작동하고 있다. 둘째가 육체적 통제이다. 얼굴의 경련조차도 당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보아 체포하고, 아침부터 힘든 체조를 하게 하는가 하면 긴 노동으로 국민들을 육체적 탈진의 상태로 이끌고, 당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잔혹한 고문을 가하는 등 육체적 고통보다 인간을 통제하는 더 강력한 수단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셋째, 정보의 통제. 당은 모든 신문의 기사나 역사마저도 그들의 목적에 부응하도록 재구성한다. 심지어 개인들은 사진이나 서류 등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록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들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소멸된다. 현재를 통제함으로써 과거를 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 속 전체주의 정권은 생각을 지배하는 언어를 통제하려 한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그 틀 속에 인간의 생각을 가두어두려 한 것이다. 이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언어에 대한 명제를 떠오르게 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는 세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일 년에 계절은 몇 개인가. 우리는 서슴없이 네 개라고 말한다. 왜일까? 계절을 나타내는 언어가 네 개뿐이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색깔은 몇 개인가. 무한의 색깔들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는 까닭에 우리는 무지개가 일곱 개의 색깔이라고 믿게 된다. 그렇게 언어는 세상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당의 대규모 심리적 조작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이중사고’(doublethink)이다. 이중사고란 하나의 마음에 두 개의 모순되는 사고를 동시에 소유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마인드 컨트롤에 의해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당의 선전을 들어도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기능과 배치되는 정부의 기관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예를 들어 ‘풍요부’는 경제적 결핍의 문제를 다루고, ‘평화부’는 전쟁의 수행을, ‘진실부’는 선전과 역사의 왜곡을, ‘사랑부’는 고문과 처형을 담당한다.


작품 속의 빅브라더는 그 존재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다. 대중들은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으며 당의 지도자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그의 실체를 알지는 못한다. 빅브라더의 상징성은 어떤 절대적 권력이 존재하며 그것에 복종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임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브라더’라는 명칭은 그가 대중들의 형제이며 보호자임을 말하지만 결국 그에 대한 충성만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어떤 강력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 경외심. 그것이 오세아니아라는 지상의 지옥을 유지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윈스턴은 그러한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 홀로 방황하다 결국 그 속에 침잠하는 비극적 인물이다. 현대인은 모두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토피아의 세계가 ‘어디에도 없는 곳’인 것처럼 디스토피아의 세계도 결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1984년에 오웰이 그려낸 세상이 아직은 오지는 않았으니까. 디스토피아에 대한 경계와 경고가 ‘1984’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작품 속 ‘사랑부’가 처벌과 감시의 기구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힘을 전파하는 그런 곳이 되는 세상을 꿈꾸고 적어도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늙어가는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