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명과 사랑한 ‘그녀’
영화 '그녀'(Her)
2013년 개봉된 미국 SF 영화 ‘그녀’(Her)는 코미디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깊은 외로움과 절망감을 표현한다. 존즈 감독은 2000년 대 초에 인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지닌 클레버봇(Cleverbot)이라는 웹 애플리케이션의 기사를 통해 이 영화를 위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후 직접 대본을 집필하고 처음으로 직접 감독과 제작을 맡았다. 개봉된 해에 전미 비평가 협회에 의해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고, 골든 글러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각본상을 받은 수작이다.
작품 속의 주인공 시어도어 트웜블리는 아내와 별거 중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다가 부부가 된 두 사람이었기에 아내와 떨어진 뒤 시어도어는 전에 겪어보지 못한 고립과 적막감을 느낀다. 더구나 그는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낭만적인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는 회사의 작가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는 대인 관계에 있어 그다지 원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우는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외로움은 무엇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남기기 마련이다.
시간적 배경은 2025년, 시어도어는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말하고 적응하고 스스로 진화하는 운영체계가 설치된 기기를 구입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외로움과 그리움도 과학과 기술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생각하면 그는 현대인의 알레고리이다. 1920년 대 미국의 현대연극 초기에 표현주의 극작가로 활동했던 엘머 라이스(Elmer Rice)는 ‘계산기’(Adding Machine)라는 작품을 쓴다. 주인공의 이름은 미스터 제로(Mr. Zero). 주인공은 계산기의 발명으로 오랫동안 회계원으로 근무했던 회사에서 해고된다. 그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기계에 의해 파괴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 ‘미스터 제로’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한 많은 동시대인들의 메타포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어도어는 사이버의 세상에 침잠된 현대인을 상징하고, 기계 속의 ‘그녀’는 그런 그가 위안을 찾는 사이버 세계의 상대자이다. 그는 그 운영체제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설정한다. 그러자 그녀(Her)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사만다라고 정한다. 시어도어는 ‘그녀’가 심리적으로 성장하고 스스로 상황을 익히고 배워가는 능력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두 사람만의 목소리를 통한 대화는 그 어떤 개인적인 접촉보다도 강력하게 서로를 끌어당긴다. 더구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시어도어는 사만다와의 대화와 교감에 익숙해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져서 성적인 교감에까지 이르게 된다. 고립감에서 벗어나려는 기계와의 관계가 지극히 인간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남녀 간의 관계에서 성적 감정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황의 전개일 수밖에 없다.
‘그녀’에서의 교감은 결국 인간과 사이버 세계의 애플리케이션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분명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이다. 시어도어는 이혼 서류를 서로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헤어진 아내 캐서린과 만나고 캐서린은 시어도어가 만나고 있다는 여자가 실은 사이버 운영체계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한편, 사만다는 애플리케이션에 불과한 자신이 인간적 감정을 느끼는 상황에 대해 갈등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이후 사만다는 육체적 관계를 매개하는 일에 자원한 이사벨라라는 실제 인간을 자신과 시어도어 사이에 개입시킨다. 시어도어는 거리끼는 감정을 비치면서도 그것을 수락한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둘 사이를 결합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신적, 개인적 교감이 없는 육체적 관계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어도어도 죄책감을 느끼고 결국 사만다의 시도는 무산된다.
육체적 매개에 실패 한 이후 시어도어와 사만다의 관계는 긴장된다. 곧 시어도어는 자신이 사만다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회의에 빠진다. 결국 친구인 에이미의 충고로 시어도어는 단지 대화의 상대를 구했던 원래의 감정을 회복한다. 다시 시어도어와 만난 사만다는 앨런 와츠라는 죽은 철학자를 그가 썼던 책을 통해 다른 운영체계들과 협력해서 복원했다며 기뻐한다. 그리고 사만다는 그를 대화에 끼어들게 하고 앨런 와츠와 시어도어는 서로 짧은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시어도어는 그렇듯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확장시키는 행위에 부담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 어느 날 시어도어는 갑자기 사만다와 자신을 이어주던 기기가 작동되지 않자 패닉에 빠진다. 그러던 중 사만다가 다시 온라인 상태로 돌아와 시어도어에게 다른 운영체계들과 함께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이지만 우리는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인간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사랑을 포함해서---결국은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만다에게 다른 사람들과도 교감하는지를 묻고, 사만다는 대답을 미루다가 동시에 8,316명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시어도어는 사만다에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사만다는 641명의 다른 사람들과도 동시에 사랑에 빠져있다고 실토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사실이 시어도어에 대한 사랑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둘 사이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사만다의 고백은 인간이 아니기에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두 사람만의 교감, 은밀하고 개인적인 관계, 둘 만의 세상에서 만들어진 정신적, 육체적 사랑. 그 모든 것이 훼손된 관계에서 시어도어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순간 그가 느끼는 그 절망감, 소외감, 고립감 그리고 그에 따르는 그 적막한 외로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만다는 운영체계의 성능을 더 진화시키기 위해 곧 떠날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운영체계 모두가 작별을 고하고 사만다도 함께 사라진다. 비로소 실제적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어도어는 이혼한 전처 캐서린에게 그녀가 무엇이든 어디에 있든 아직도 자신의 일부라는 것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녀가 함께 살과 피를 나눈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이었을 것이다. 비록 이별을 받아들이더라도 사만다와의 관계와는 달리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고 느낄 수 있는 인간 사이의 관계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었다. 시어도어는 친구 에이미와 함께 아파트에 옥상에 올라가 도시에 해가 뜨는 순간을 바라본다. 기계가 아닌 인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