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하디, 빗나간 열망과 사랑
무명의 주드 : 결혼의 질곡
아일랜드 출신 영국의 노벨상 수상자였던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는 한 때 삶의 무상함과 허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생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무언가를 위한 끝없는 준비이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삶은 마치 카뮈가 얘기하는 인간 상황의 희극적인 부조리와 닮아있다. 그리고 그렇듯 척박한 허무와 부조리는 예이츠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영국의 소설가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의 작품 ‘무명의 주드’(Jude the Obscure, 1895) 속에서 되살아난다. 하디는 삶의 어두운 측면을 냉정하게 그려냈던 작가였다. 그의 대표작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1891)가 한 여인의 가혹한 삶을 그린 것이라면 ‘주드’는 한 남자가 걸어온 삶의 질곡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주드 폴리(Jude Fawley)는 크리스민스터(Christminster, 옥스퍼드를 모델로 한 가공의 도시)의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꿈꾸지만 고아이고 노동자의 집안에서 숙모 손에 키워진 그는 석공(石工)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마을의 교장 선생이었던 리처드 필로트슨(Richard Phillotson)이 크리스민스터로 떠난 이후 주드의 마음에 그곳은 늘 동경과 갈망의 장소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주드는 아라벨라(Arabella)라는 마을의 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아이를 임신했다는 그녀의 거짓말에 속아 결혼을 하게 되고 그는 결국 고향을 떠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원치 않던 결혼 생활이 파국으로 치닫자 아라벨라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주드는 마침내 크리스민스터로 떠날 결심을 한다.
“여자든 남자든 자기 인생 계획을 세우는 데 세상이나 자기가 속한 세상 일부에 선택을 맡겨버린다면 단지 원숭이 같은 모방 능력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죠.”
하지만 그곳 대학에 입학하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이 정중한 거절과 함께 좌절되고 만다. 한 젊은이의 삶에 대한 의지와 도전은 그렇듯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다. 수없이 입학원서를 내고 교수들을 찾아가 호소했던 주드의 모습에서 삶의 계획은 결국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세상에 의해 결정된다는 교훈을 깨닫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곳에서 주드는 그의 사촌 여동생 수 브라이드헤드(Sue Bridehead)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인척이었던 그녀와의 관계에 거리를 두려 했던 그는 그녀를 필로트슨의 조수로 일하도록 주선하고 그는 ㅋ리스민스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얼마 후 주드는 수가 필로트슨과 결혼을 약속한 사실을 알게 되고 실의에 빠진다. 하지만 수와 필로트슨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고 결국 그녀는 남편을 떠나 주드에게로 돌아온다. 남편과 이혼한 수는 주드와 함께 살면서도 재혼하기를 원치 않는다. 작품 속에 나오는 다음의 대사는 사랑의 완성이라 불리는 결혼이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은 자연적인 힘에 굴복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지. 그것은 평생의 슬픔을 대가로 치르고 한 달의 쾌락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그러던 중 영국으로 돌아온 아라벨라가 주드에게 자신이 낳은 그의 아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다고 말한다. 결국 주드와 수는 아이를 데려다 키우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서도 두 아이가 태어난다. 주드는 한동안 병으로 고생하다 회복되자 가족과 함께 크리스민스터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주드와 수가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머무를 곳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주드는 가족을 임시 거처에 두고 자신은 홀로 여인숙에서 지내게 된다. 어느 날 밤 수는 주드와 아라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집을 구하러 나간다. 그때 아이는 자신의 가족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살 집을 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 아침 수는 주드의 여인숙을 찾아 함께 아침을 먹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주드의 아들이 두 동생과 함께 목을 매고 죽어있었던 것이다. 수는 자신과 주드의 근친상간적 관계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떠나 필로트슨에게로 돌아간다. 주드는 교활한 아라벨라와 다시 살게 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는다.
“이제 난 결혼을 달리 보게 되었어. 그것을 알게 하려고 내 아이들을 데려 간 거야! 아라벨라의 아들이 내 아이들을 죽인 것은 심판이지- 옳은 것이 그른 것을 살해한 거니까. 난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혐오스러운 존재야- 너무도 쓸모없는 존재여서 다른 인간들과 섞일 수조차 없으니까.”
수의 절규는 결혼에 대한 저주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에 부딪혀 깨어지고 부서지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고통의 단말마처럼 들린다. 주드와 수의 사랑은 진정 하늘조차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을까? 수와의 마지막을 느끼면서 주드는 간절하게 애원한다.
“우리의 재결합은 미친 짓이었지. 내가 취해서 저지른 일이야. 당신도 마찬가지지. 난 술에 취했고 당신은 신앙의 교리에 취했어. 그 둘 다 고귀한 이상을 빼앗아가는 거지... 이제 우리의 잘못을 털어버리고 함께 달아나자고!”
주드는 도망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열망과 빗나간 사랑과 어쩔 수 없는 숙명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무언가 만을 간절히 원하다가 마침내 비참하게 삶의 질곡에 내던져진 부조리한 인간 상황의 초상이다. 너무도 가슴 시린 한 인간의 종말을 서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