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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죽음

'작은 아씨들'의 베스와 '생쥐와 인간'의 레니

by 최용훈

죽음은 결국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 사후의 세계는 현실의 삶과는 무관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는 닥쳐올 미래일 뿐이다. 슬픈 죽음은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슬픈 삶과 애끓는 ‘남겨짐’은 오롯이 산 사람들의 몫이다. 모두의 운명인 죽음의 문제는 거의 모든 문학 속에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감상은 또한 독자들의 몫일뿐이다.


1. 미국의 여성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 1832~1888)의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880)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며 작가의 자전적 작품이다. 마치(March) 일가 네 딸들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시련의 날들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시기에 쓴 두 편의 소설이 합본 형식으로 묶어진 이 작품은 상업적으로나 문학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낭만적인 동화와 감상적인 소설의 양식이 합쳐진 이 작품은 19세기 미국 젊은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네 자매의 모습을 통해 조명하고 있기도 하다.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편의 연극과 영화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큰 딸 멕(마가렛)은 아름답고 전통을 중시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둘째 달 조(조세핀)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말괄량이였다. 셋째 딸 베스(엘리자베스)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늘 집안에만 있었으며 막내 에이미는 예술가를 꿈꾸는 소녀로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멕은 이웃 아이들의 가정교사를 하고 조는 부자 숙모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고 있었던 시절에 두 자매가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네 자매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멕은 다소 허영심이 있었고, 조는 다혈질이었으며 베스는 심각할 정도로 소심하고 에이미는 물질적인 것을 탐닉하는 성향이 있었다. 소설은 이렇듯 다른 네 여성의 일상과 감정 그리고 사랑을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의 공감과 자기 연민의 감정을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세 자매가 자신들만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동안 내성적이었던 베스는 마치 성장을 멈추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의 첫 부분에 13세의 소녀로 등장하는 베스는 친절하고, 따뜻하지만 말이 없고 수줍은 성격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솔직했고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그녀는 집안의 화목에 중심적인 역할을 할 만큼 현명한 소녀였다. 하지만 자매들이 성장하여 모두 집을 떠나는 동안 그녀는 집과 가족에게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녀는 특히 둘째 언니 조와 가까웠다. 이후 베스가 성홍열에 걸렸을 때 그녀의 간호는 전전으로 조의 몫이었다. 조는 동생의 곁을 한시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스는 성홍열을 앓은 후 극도로 쇠약해져 간다. 베스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며 가족들도 그녀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은 그녀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을 그녀가 좋아하는 물건들로 채운다. 그녀의 고양이와 피아노, 아버지의 책들, 막내 동생 에이미의 스케치와 인형들... 그녀는 학교를 오가는 이웃의 아이들에게 줄 옷과 모자와 장갑들을 만들기 위해 늘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뜨개질바늘을 “너무 무거워”라며 떨어뜨리는 순간 그녀는 그토록 떠나기 싫었던 집과 가족과 이별하고 혼자만의 긴 여행을 떠나고 만다. 그렇게 베스의 세상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남겨진 이들의 슬픔과 그리움으로 치환된다. 모든 평범한 죽음의 모습일 뿐이다. 어찌 보면 그녀의 착하고 순수한 심성은 척박한 세상살이에 맞지 않았을지 모른다. 일찍 세상을 등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여전히 선한 모습만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베스의 평범한 죽음 뒤에도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사과를 따는 계절에 그녀의 어머니는 세 딸과 남편 그리고 다섯 명의 손자와 함께 그녀의 예순 번째 생일을 맞는다.


2.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의 작가로 잘 알려진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1962)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1902~1968)의 또 다른 대표작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 1937)은 ‘노벨라’(novella)라고 불리는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미국의 대 공황기를 배경으로 일거리를 찾아 캘리포니아를 떠도는 두 명의 목장 노동자 조지 밀튼과 레니 스몰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많은 학교에서 교재로 읽히기도 하지만 거칠고 인종차별적인 표현으로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 이유로 전미 도서 협회에 의해 ‘21세기 가장 문제적 도서’ 목록에 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타인벡의 작품들은 주로 억압받는 자 혹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혹독한 운명과 불의를 다루고 있다.


떠돌이 노동자 조지와 레니는 함께 캘리포니아의 한 농장에 일거리를 얻는다. 조지는 머리는 좋지만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레니는 거구에 힘까지 셌지만 지능이 낮은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들만의 농장을 만들어 정착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레니는 농장에 토끼를 키우고 싶어 했고 늘 그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자신의 억센 완력을 조절하지 못하여 그는 종종 작은 동물들을 힘으로 눌러 죽이곤 했다. 사실 두 사람은 전에 있던 곳에서도 레니가 한 여자의 스커트를 움켜쥐고 놔주려 하지 않음으로써 강간 혐의자로 몰리자 도망쳐온 것이었다. 결국 조지가 아둔한 레니의 보호자 역을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농장에 일거리를 얻은 후 그들은 체격이 왜소한 농장주의 아들 컬리와 부딪힌다. 그는 체격이 큰 남자를 싫어해서 사사건건 레니에게 트집을 잡는다. 두 사람은 또한 나이 든 농장의 잡역부 캔디와 지적이고 친절한 가축 몰이 팀 반장인 슬림을 만나게 된다.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꿈은 현실에 다가서고 있었다. 캔디가 자신도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준다면 350달러라는 거금을 농장 구입에 투자하겠노라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의 농장을 갖게 된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들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컬리가 레니를 공격하고 결국 레니는 그의 주먹을 부서뜨린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레니는 마구간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마구간 지기 크룩스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흑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농장의 일꾼들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처지였다. 한참 뒤 캔디가 두 사람을 찾아내어 얘기 끝에 크룩스도 농장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라고 권한다. 크룩스는 그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농장에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


컬리의 아내는 늘 레니를 비롯한 일꾼들에게 교태를 부린다. 하지만 속으로는 일꾼들을 무시하고 심지어 흑인 크룩스에게 린치(lynch, 私刑)를 가하려는 사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레니는 자신의 강아지를 쓰다듬다가 힘을 줄이지 못해 강아지를 죽인다. 그때 컬리의 아내가 헛간으로 들어와 레니에게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자신의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어떻게 무너지고 말았는지를 말한다. 그리고는 레니의 습관을 알아채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레니의 힘은 여전히 강했고 그녀는 비명을 지른다. 순간 당황한 레니가 그녀의 목을 부러뜨리고 두려움에 달아난다. 농장의 일꾼들이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알린 뒤 달아난 레니를 추격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조지는 농장의 꿈이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대피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그를 발견한다. 둘은 농장으로 돌아오고 이제는 깨어진 꿈이 되어버린 농장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레니를 찾는 무리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조지는 레니를 향해 총을 발사한다. 린치를 하려는 무리의 손에 넘겨지기보다는 자신의 손에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컬리와 슬림, 그리고 난폭한 농장 일꾼 칼슨이 도착한다. 주위를 돌아본 슬림은 상황을 눈치채고 조지를 위로하듯 밖으로 나가게 한다. 컬리와 칼슨은 무슨 일인지 모른 채 망연히 레니의 주검을 바라본다.


레니의 죽음은 베스의 죽음과는 달랐다. 그것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상실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지르고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문학적 상상의 영역이지만 우리는 그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사실은 동일한 시간의 영역에 머물고 있으며 그것을 구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변치 않는 것은 모두의 죽음 뒤에도 어떻든 세상은 계속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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