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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죽음

by 최용훈

“1819년 포경선 에섹스 호는 칠레 해안에서 3000 마일 떨어진 태평양의 먼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20명의 미국인 선원들은 그들의 배가 향유고래의 습격을 받아 선체에 물이 들기 시작하자 공포에 빠진다. 결국 세 척의 작은 배에 약간의 식수와 식량을 나누어 싣고 탈출을 시도한 그들에게는 오직 세 가지 선택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나는 가장 가까운 마르키즈 군도의 육지로 향하는 것인데 그곳은 식인종들이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두 번째는 하와이로 가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계절의 거대한 폭풍을 마주쳐야 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해류를 타고 1500마일 떨어진 남미의 해안에 도착하는 것이지만 가는 길에 식량이 모두 떨어질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첫째와 둘째의 선택이 상기시키는 끔찍한 상상을 떨치지 못하고 세 번째를 선택했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승무원들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


위의 글은 2012년 미국의 여성 작가 카렌 톰슨이 TED 강좌를 통해 ‘두려움’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했던 내용 중에 나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 딕’(Moby-Dick)에 영감을 끼친다. 식인종과 폭풍에 대한 두려움이 앞으로 겪게 될 것이 분명한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보다 컸던 것일까? 극한의 상태에서 인간은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선택은 과연 최선일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문학 속에 그려지는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은 현실보다 더 생생하다. 그 과정과 배경과 결말을 알거나 미리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스데모나의 죽음은 ‘오셀로’의 마지막 5막에서 벌어지지만 독자와 관객들은 이아고의 계략이 어리석은 오셀로를 더욱 깊은 의심과 질투심에 빠져들게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결말에 대한 선명한 두려움에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마리아나 토고브닉(Marianna Torgovnick) 교수는 문학 속에 그려지는 두려움의 실체를 열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운명으로서의 죽음, (2) 그릇된 이유로 죽음을 회피하는 일, (3) 굶주림과 심각한 육체적 고통, (4)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5) 버림받거나 원치 않는 사랑을 받는 일, (6) 질병과 늙음, (7) 평판의 하락이나 이혼, 스캔들, (8) 전쟁, 난파, 재난, (9) 법과 법률가, (10) 현실과 문학의 차이


이 글에서는 문학 속에 표현된 죽음에 대한 감정들을 몇몇 작품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정전(正典)으로 알려진 문학 작품에서 톨킨(Tolkien)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이르기까지 문학 속에 반복적으로 표현되어 왔다. 죽음은 일순간에 생의 모든 흔적들을 지워버리고 만다. 간혹 옅은 기억의 조각들이 뿌려질지도 모르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살아있음의 자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랑도 명예와 부도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 존 키츠의 다음의 시구는 그의 가슴에 자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묘사한다.


나의 펜이 내 머릿속 들끓는 생각을 다 적어내기 전에,

활자로 가득한 높이 쌓인 책들이

풍성한 곡창(穀倉)처럼 잘 익은 곡식알을 채 품기도 전에,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

................

그때 나는 광막한 세계의 해변에 홀로 서서 생각한다.

사랑과 명성이 無로 가라앉을 때까지...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여인을 남겨두고 죽음을 맞이한 천재 시인 키츠의 시는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영혼을 얼마나 짓누르고 있었을까? 하지만 어디 키츠뿐이었으랴. 죽음이 모든 것의 끝임을 알고 있는 한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이들의 똑같은 감정일 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는 소네트 60번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 마주칠 삶의 종말을 묘사한다.


파도가 조약돌 깔린 해변으로 들이치듯이

우리의 시간도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바꾸어가며

꼬리를 물며 서로 앞서 가겠다고 다투고 있다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의 운명 못지않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삶의 의미 자체를 지워버린다. 그것은 영혼에 가해진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인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실험적인 소설로 알려진 ‘파도’(The Waves)는 여섯 등장인물의 독백들로 채워진다. 버지니아와 가까운 문인들과 가족의 모습이 은연중에 그려지고 있다. 또 한 사람의 등장인물, 제7의 인물 퍼시벌(Percival)은 작품 속에서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지만, 그는 작가 버지니아의 삶에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남은 그녀의 오빠 토비 스티븐(Thoby Stephen) 임이 암시된다. 평생을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결국 오십 대 초반에 버지니아는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넣고 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녀의 척박한 삶에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토비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버지니아가 겪어온 모든 고통의 원인이었다. 작품 속 등장인물 버나드(Bernard; 버지니아의 친구였던 작가 E. M. 포스터에게서 영감을 얻은 인물로 알려져 있음)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침묵이 필요하다. 홀로 있고도 싶고 밖으로 나가고도 싶다. 한 시간이라도 내어 나의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죽음이 나의 세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보고 싶다.”


더구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만일 바로 당신에 의한 것이었다면? 당신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었더라도 당신의 무관심, 실수,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 죽음은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내의 정숙함을 깨닫고 모든 것이 계략에 의한 속임수였음을 알게 된 오셀로는 이렇게 절규한다.


“오셀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 악마들이여 모진 바람 속에 나를 휘몰아 다오.

유황불로 태워다오. 저 짙은 불바다 속에 던져다오.

아,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 당신은 죽었구려.

아, 아, 아!” (오셀로, 5막 2장)


토머스 하디(Thomas Hardy)의 ‘무명의 주드’(Jude the Obscure)에서는 가난한 부모가 살 집을 빌리지 못하는 것이 양육하는 아이들이 많아서라고 생각한 어린 아들이 두 동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처구니없고 비참한 죽음이 그려지고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에서 궁정광대 리골레토는 호색한 만토바 공작과 함께 귀족의 부인이나 딸들을 농락하면서 권력이 주는 쾌감을 즐긴다. 하지만 공작이 자신의 딸 질다를 겁탈하자 분노에 사로잡혀 그를 죽이려 한다. 하지만 공작에 대한 사랑으로 질다가 살인 청부업자의 칼을 막아서다 대신 죽음을 맞는다. 리골레토는 자루에 든 시신을 강에 버리려다 그 안에 든 시신이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헛된 쾌락과 증오가 불러온 저주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오페라 ‘카르멘’의 남자 주인공 돈 호세는 어리석고 무모한 사랑으로 인한 절망감 속에서 카르멘을 죽이고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고 만다.


인간의 운명 가운데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은 결국 문학이 그려내는 삶의 일부일 뿐이다. 로마의 극작가 세네카의 말처럼 문학 속의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소망이고, 누군가에게는 위안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의 종말‘일지 모르겠다. (Death is the wish of some, the relief of many, and the end of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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