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Jul 18. 2020

햄릿, 복수와 여성성

셰익스피어 인문학: Hamlet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깊은 절망감 속에 빠져있었다. 그에게 있어 덴마크는 감옥이었다. (Denmark is a prison. 2막 2장) 극의 초반, 햄릿은 아직 자신의 아버지가 숙부 클로디우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 거트루드가 남편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이 왕위에 오른 그녀의 시동생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재혼에 번민하던 햄릿에게 죽은 부왕의 유령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를 말하며 복수를 당부한다. 이후 햄릿은 어머니의 배신과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복수에 대한 번민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햄릿’은 복수극이 된다.     

  고대 그리스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오레스테스 이야기'(Oresteia) 3부작은 복수극의 전형이다. 주인공 오레스테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가멤논 왕과 왕비 클리타임 네스트라의 아들이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미케네의 왕이었던 아가멤논은 그리스의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사나운 폭풍이 닥쳐 원정을 떠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딸을 잃은 그의 아내 클리 타임 네스트라는 남편에게 원한을 품고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귀향한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이를 알게 된 오레스테스의 선택은 복수였다. 그는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여 부왕의 원수를 갚는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후 그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된다. 마침내 심판대 앞에 선 그에게 신들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신들의 의견이 유죄와 무죄 동률을 이루자 아폴로 신은 최종적으로 그에게 무죄를 선언한다.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복수의 사슬을 끊고자 하는 고대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레스테스의 경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 유령은 햄릿에게 복수를 당부하지만, 클로디우스의 유혹에 넘어간 왕비, 햄릿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네게 천륜의 정이 있거든, 참지 마라.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어머니에 대해선 어떤 악한 마음도 갖지 마라. 네 어머니는 하늘에, 

         그리고 네 어머니의 양심에 맡기 거라. “  (유령, 1막 5장)    

  물론 햄릿의 어머니를 남편을 죽인 클리타임 네스트라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아들에게 어머니를 죽이는 패륜의 죄만은 저지르지 않게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드러난다. 반면 남편을 잃고 다른 남자와 재혼한 한 여성으로서의 거투르드, 비록 시동생이었지만 홀로 된 여인이 순수하게 받아들인 사랑의 대상이었다면 그녀의 선택과 여성성 또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죽은 남편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시동생과 재혼한 ‘햄릿’ 속의 거트루드는 단지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햄릿의 편협한 증오심도 비판받아야 한다. 그녀의 여성성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수는 무엇인가? 복수에는 배신이 전제된다. 믿었던 누군가의 배신. 그것은 쓰라린 증오의 감정을 남긴다. 증오는 분노와는 다르다. 분노는 순간적이어서 자제를 통해 극복될 수 있지만, 증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지는 고통의 감정이다. 그래서 증오는 복수를 부른다. 스페인의 철학자 가세트(Ortega Y Gasset)는 증오를 가리켜 “가치의 멸종으로 이끄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증오 앞에서는 사랑, 우정, 가족 간의 유대 등 그 어떤 가치도 파괴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신-증오-복수의 순환구조가 만들어진다.     

  오늘날에는 배신 없이도 증오가 생겨난다. 아버지가 살해되는 엄청난 사건이 없어도 우리는 증오에 사로잡히고, 이유 없는 복수를 꿈꾼다. 그래서 증오범죄(hate crime)가 만연한다.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증오를 품고 폭력을 가한다. 인종, 종교, 심지어 성적 정체성의 차이마저 증오를 일으킨다. 배신 없이 생겨난 증오와 이유 없는 복수심. 그것이 현대의 위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범한 유태인에 대한 범죄. 그것은 인종의 우월성이란 터무니없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아인(게르만인)에 대한 우월주의와 반유태주의가 결합한 나치즘은 무려 600만 명 이상의 유태인들을 학살하였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사악한 도전이었다. 독일인들은 왜 유태인들을 증오하였는가? 왜 그들에게 그토록 잔인한 집단적 살해극을 벌였는가? 그것은 현대의 증오범죄에 다름 아니었다. 배신이 없어도 일어나는 증오, 이유 없는 적개심이 20세기 중반에 경악할 인류의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25년이 지난 1970년, 전쟁과 인종청소라는 범죄의 원흉이었던 독일, 그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학살로 희생된 폴란드 유태인들의 위령탑 아래 무릎을 꿇고 흐느낀다. 그렇게 독일은 속죄의 마음을 보였고 그들에 대한 인류의 증오는 비록 작지만 치유의 순간을 맞이한다. 배신, 증오, 복수의 순환 고리를 끊는 것은 역사가 요구하는 인류의 사명 일지 모른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복수심은 잘 선택된 인간의 보편적 감정 중의 하나이다.’ 사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사소한 복수를 일삼는다. 못된 상사들에 대한 직장인들의 소심한 복수들. 상사의 말을 못 들은 척하거나 엘리베이터를 향해 급히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도 버튼을 눌러 문을 닫는 것. 그런 작은 복수들은 남에 의해 겪은 아픔을 되갚아주려는 보상심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다른 부족의 공격을 당한 부족 중에 그것에 대항해 당한 만큼 갚아주던 종족이 그렇지 못했던 종족보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컸다고 한다. 그렇게 복수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본성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화와 문학 속에 수많은 복수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숲의 요정 에코는 아름다운 나르키소스와 홀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나르키소스는 여인과의 사랑에 관심이 없었다. 결국 이루지 못할 사랑에 절망한 에코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나르키소스도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게 해 주세요.’ 에로스는 나르키소스가 호숫가에서 물을 마시려 할 때 사랑의 화살을 쏜다. 화살에 맞은 그는 그 순간 물속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자신의 그림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가슴 아픈 사랑의 복수이다.       

  햄릿은 클로디우스 왕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없이 복수를 지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복수가 두려운 것일까? 물론 왕을 죽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햄릿의 망설임은 복수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확신의 결여에서 온 것이었다. 비록 부왕의 유령이지만 그 초자연적인 현상 하나로 살인을 확신하고 복수를 수행할 수 있는가? 햄릿은 번민한다. 그것은 삶과 운명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와 선택의 문제였다. 다음의 독백은 그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 선택의 갈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항거해

        일어나 무기를 들고 

        그것에 맞서 끝장내버릴 것인가

        어느 것이 더 고귀한 일인가? “  (햄릿, 3막 1장)  

  어떤 이는 위의 번역 가운데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는 햄릿이 마주한 선택의 고민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복수를) 하느냐 마느냐’ 혹은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의 흐름 상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위의 독백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 즉 존재에 대한 물음이랄 수 있으므로 ‘사느냐 죽느냐’가 더욱 큰 의미를 담아내는 것 같다. 인생은 선택이다.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는 것이 인간이다. 햄릿은 복수라는 행위, 살인이라는 행위에 대해 망설이고 있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많은 비평가들이 관심을 가져왔지만, 복수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일 수 있을까? 햄릿의 망설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살인 앞에서의 갈등이다. 셰익스피어는 복수심이 인간의 보편적 본성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극이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햄릿은 숙부의 범행을 확인하기 위해, 성을 방문한 유랑극단을 시켜 살인의 현장을 재현하는 연극을 공연하게 한다. 그리고 그 연극을 관람하는 클로디우스 왕의 반응을 살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자리를 뜨는 왕의 뒤를 햄릿이 쫓는다. 그리고 그가 부왕을 살해했다는 확신을 갖는다. 하지만 클로디우스는 양심의 가책과 죄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올린다.     

        이 더러운 죄악. 그 악취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인간 최초의 저주

        동기를 죽인 죄. 이제 어찌 기도를 하겠는가.

        마음은 간절하건만 

        더 커진 죄책감에 기도의 마음조차 꺾이고 마는구나.  (클로디우스, 3막 3장)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본 햄릿은 다시 한번 복수의 실행을 미룬다. 그에게는 더 분명하고 확실한 복수의 명분이 필요했다. 기도하는 인간을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회하고 회계하는 원수에게 저주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기독교의 믿음에도 위배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햄릿은 이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하려면 지금이지. 기도를 하는 동안 

        그런데 지금 해치운다면, 천국에 갈 것이 아닌가.

        복수는 하겠지만, 생각해 볼 일이다. 

        아버지를 죽인 악당, 그런데 그 대가로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인 내가 이 악당을 

        천국으로 보낸단 말인가.

        이건 복수가 아니지. 오히려 시혜를 베푸는 일.  (3막 3장)    

  그의 망설임을 설명할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살인에 대한 거부감일까? 어머니에 대한 연민일까? 20세기 초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햄릿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용어로 햄릿의 망설임을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에서 따온 이 용어는 ‘사내아이가 세상에 나와 제일 먼저 이성으로 인식하는 존재가 어머니이고 그런 이유로 어머니의 남자인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갖는다.’는 이론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한다. 프로이트의 생각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 햄릿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 클로디우스 왕과 동질감을 느끼고 복수를 끊임없이 망설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흥미로운 분석일 수는 있겠지만 셰익스피어가 그려내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는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햄릿의 망설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모두의 망설임이지 않을까? 아무리 원한이 깊고, 증오가 끓어올라도 선뜻 살인을 결심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인간은 증오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군사전문가들은 당시 전장에서 사용된 총기들을 수거해 분석한 결과, 과반수의 총기가 한 번도 격발 되지 않았음을 발견하였다. 인간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생사의 갈림에서도 차마 같은 인간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었던 것이 불과 100년 전의 우리였던 것이다. 증오에 빠진 인간은 누구나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그것을 차마 실행하지 못하는 것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이유 없는 증오심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를 통해 증오와 분노의 천박함을 다시 깨달아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유럽의 르네상스가 영국 섬으로 건너와 한창 꽃 피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듯 하나의 시대가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사이에는 긴 시간적 중첩이 생겨난다. 천 년 간 계속되었던 중세의 정신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에 의해 창조된 질서의 세계, 존재의 위계, 인간의 나약함과 신에 대한 의존과 경외심은 모두 신 중심의 세계였던 중세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또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 자유로움의 추구, 강요된 질서에 대한 저항의 욕구가 분출되던 르네상스의 시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는 여러 측면에서 르네상스의 정신과 가치관이 표출되고 있다. 햄릿의 대사 속에 등장하는 인간에 대한 예찬이 그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멋진 작품인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한가!

         능력은 얼마나 무한한가! 모습과 동작은 얼마나 

         명료하고 찬양할 만한가! 행동은 천사와도 같다!

         지혜는 신과도 같다! 세상의 아름다움이여!

         만물의 영장이여! “  (햄릿, 2막 2장)    

  르네상스의 인간관을 이보다 더 명료하게 묘사한 것이 있을까?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인정하고 심지어 인간을 천사와 신에 견주는 것은 중세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엄청난 사상의 변화였다. 그러한 주장이 중세에 나왔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은 아마도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르네상스가 가져다준 놀라운 변화이자 자유로움이었다. 하지만 햄릿은 바로 이어지는 대사에서 인간에 대한 강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는 우리 모두 한갓 먼지에 불과해 보이네.

         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자네는 미소 짓고 있군. 나와는 분명 다른 생각이겠지. “  (햄릿, 2막 2장)    

  햄릿은 인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잃고 있었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르네상스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경험이 인간에 대해 절망적인 느낌을 갖게 한 것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생각은 어머니에 대한 강한 배신감에서 비롯되고 있다. 극의 시작 부분에서 햄릿은 어머니에 대한, 여성에 대한 자신의 실망감을 표현한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한 달도 못되어, 니오베처럼 눈물에 젖어

         아버지의 영구를 따르던 그 신발이 채 닳기도 전에

         어찌하여 그녀가, 어찌 그녀가-

         오, 신이여. 사리 분간 못하는 짐승이라도 

         좀 더 슬퍼했을 것을- 시동생의 품에 안기다니.  (1막 2장)    

  어머니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은 여성 전체에 대한 햄릿의 인식을 바꾸어 놓는다. 사랑하는 여인 오필리아는 햄릿에게 사랑의 고백 대신에 조롱과 멸시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비극적인 운명은 엇갈리기 시작한다. 오필리아에게 보냈던 햄릿의 편지는 그녀에 대한 사랑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땅 속에 불이 있음을 의심하고,

         하늘에 별이 움직임을 의심하고,

         진실이 거짓이라 의심해도,

         그러나 내 사랑만은 의심 마오.

         내 영원한 사랑,

         살아있는 한 사랑하리오. 

         햄릿으로부터‘         (2막 2장)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었던가! 햄릿의 사랑도 그러했다. 어머니에 대한 혐오와 복수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고 애써 변명할지 모르지만 오필리아에 대한 햄릿의 변화된 태도는 남성의 비루함, 여성에 대한 편협함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를 향한 햄릿의 천박한 말과 행동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래서 ‘햄릿’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유치하지만 잔인한 복수에 불과했다. 강자인 클로디우스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복수를 미루면서도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서만큼은 어찌 그리 냉혹했는가! 현대의 남성들이여, 반성하고 회계하라.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랑하는 여성을 평가하려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책망해야 한다. 비록 복수를 위해 미친 듯 행동하고, 오필리아를 통해 왕이 햄릿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음을 의심했다 하더라도 햄릿의 다음 대사는 변심한 남자의 넋두리일 뿐이다.     

        “오, 넌 날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수녀원에나 가, 가버려. 

         네가 왜 죄인들의 어미가 돼야 하지? 난 내가 제법 정직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머니가 차라리 날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그런 죄목들로

         나 자신을 고발해야 될 판이야. 오, 난 너무나 오만하고, 야심도

         너무 크고, 안하무인에다,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죄를 짊어지고 있어. 

         나 같은 놈이 하늘과 땅 사이를 기어 다니면서 뭘 한단 말이야? 

         수녀원에나 가버려. 우린 모두 끔찍한 악당 들일뿐이야. 아무도 믿지 마.        

         수녀원에나 가버려! “  (3막 1장)    

  햄릿의 저주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다는 인간 전체를 향해 쏟아내는 혐오와 불신처럼 들린다. 심지어 스스로를 비난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죄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원망하고, 오필리아에게 그런 죄인의 어머니가 되지 말라고 악담을 퍼붓는 햄릿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수녀원에나 가라고 말하는 햄릿에게 세상의 모든 여인은 그저 죄인을 잉태하는 존재일 뿐이다. 오필리아는 실연의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미쳐버리고 결국 스스로 호수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린다. 사실 누군지 모르고 한 일이었지만 햄릿은 어머니의 방 커튼 뒤에 숨어있던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게 한다. 한 때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오필리아는 결코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마음에 둔 햄릿이 사랑하던 여인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햄릿’이라는 희곡의 가장 큰 딜레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실성한 상태에서도 그녀는 햄릿에 대한 애잔한 사랑을 노래한다.    

        “맨머리로 관에 얹혀 떠메어 갔지;

         헤이 논 노니, 노니, 헤이 노니;

         무덤에는 억수 같은 눈물의 비가;

         안녕, 사랑하는 당신.

         ..... 

         이건 로즈마리, 날 잊지 말라는 것이에요; 기도하고

         사랑하고, 기억해요; 이건 팬지꽃, 날 생각해달라는 꽃이에요.  (4막 5장)    

  셰익스피어는 비극 속에서 남자의 성급함과 옹졸함으로 희생되는 여성들을 그려낸다. 오필리아가 그랬고, 오셀로의 아내 데스데모나, 리어 왕의 막내딸 코델리아가 그랬다. 반면 희극에서는 여성이 단지 희생자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지혜와 덕성으로 어리석은 남성을 올바르고 행복한 길로 인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는 페미니스트였을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여성의 역할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거트루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왜 하나뿐인 아들 햄릿의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 독배를 마시고 죽어야 했는가. 남편이 죽고 새로운 남편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그녀는 부정한 여인으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햄릿은 어머니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고귀한 당신이 이렇게 더러운 늪에 내려와서 시궁창 흙탕물을 마시는 

         것입니까. 당신의 나이가 되면 맹목적인 정열도 가라앉아 넉넉히 

         분별도 함직한데, 어찌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셨단 말이요. 

         정욕이 있는 것을 보면 감각도 있으련만 그 감각이 마비되었단 말씀이요. 

         당신은 얼굴도 붉힐 줄 모릅니까? 

         ..............

         음탕한 이부자리 속에 들어가 썩은 것이 부글부글 끓는 저 더러운 돼지와 

         희롱을 하며 자다니---   (3막 4장)    

  모성은 언제나 여성성을 앞서야 하는가? 어머니는 여자가 될 수 없는 것이고,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여성은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이다. 여성의 정체성은 모성에만 국한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 때문에 모성을 파괴한 메데이아, 탐욕으로 모성마저도 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맥베스 부인을 비난한다. 그리고 남편의 동생과 결혼한 거트루드를 경멸한다. 하지만 그녀는 메데이아나 맥베스 부인과는 다르다. 그녀는 클로디우스가 남편의 살인자라는 것을 몰랐고, 그 시대에는 홀로 된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크게 비난받지 않았다.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를 지켜보며 마음 졸이던 그녀의 모습은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그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녀는 클로디우스가 햄릿을 죽이기 위해 준비해 둔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면서도 햄릿에게 위험을 경고한다.     

        “힘들어 보이네. 숨도 차오르고. 

         햄릿, 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렴. 

         너의 행운을 위해 이 잔은 내가 마시마. “ 

         ..............

        “오, 안돼. 저 술, 

         저 술! 오, 햄릿, 저 술, 저 술! 

         독이 들었구나. “   (5막 2장)    

  햄릿은 어머니의 재혼에 실망해 그것을 더러운 정욕에 빠진 것으로 경멸하고 조롱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거트루드를 통해 사랑을 찾는 여성성과 아들을 걱정하는 모성 모두를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페미니즘의 주된 이슈가 모성에 의해 희생된 여성성이란 점을 고려할 때 셰익스피어의 여성에 대한 묘사는 시대를 초월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햄릿’ 속의 모든 인물들은 죽음을 맞는다. 어머니를 저주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를 죽인 햄릿. 그가 비록 운명의 수레바퀴에 걸려 비극에 빠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최후가 죽음 이외에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모두의 죽음으로 끝나는 ‘잔인성의 비극’이라 불린다. 하지만 복수와 망설임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 여성성과 모성 사이의 갈등이라는 영원한 문학적 테마가 셰익스피어에 의해 오늘날에도 되살려지고 있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셰익스피어의 희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