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문학: King Lear
오늘날에도 리어왕 같은 아버지가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누어줄 왕국을 가진 사람도 없겠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물어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왕국이든 재산이든 물려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리어 왕을 보고 있자면 왠지 짠하게 오늘의 늙은 아버지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평생 가부장적이어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권위를 누리려는 고집쟁이 영감, 평생 고생해서 키워놨더니 부모 은공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 됐다고 한탄하는 저 가련하고 무기력한 노인들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리어 왕의 비극적 결함은 자만심이다. 그리스인들이 인간 본성의 가장 보편적인 약점이라고 보았던 자만심이 리어를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는 또한 죄인이었다. 중세의 왕권신수설은 왕의 권력조차 신이 부여한 것이고, 왕이라 하더라도 그 신성의 권력을 자신의 의지로 나누거나 양도하는 것은 죄였다. 자만심에 사로잡혀 신이 창조한 질서를 파괴한 죄. 그것이 ‘리어 왕’의 테마이다. 자만심은 무엇이며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성 오거스틴은 자만심을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남보다 조금 더 가지고, 남보다 조금 더 높고, 남보다 조금 더 잘났음을 느낄 때, 인간은 스스로의 우월성에 도취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리석은 자만심의 희생물이 된다. 그래서 성서에도 ‘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Pride goes before destruction)라고 말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커쇼(Ian Kershaw)는 2,000년에 발행된 그의 저서 ‘히틀러 전기’를 두 개의 파트로 나누고 있는데 그 첫째가 ‘Hubris'(자만)이고 두 번째가 ’Nemesis'(인과응보)였다. 결국 히틀러의 잔혹성은 그의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것에는 언제나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책의 소제목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17세기에 그려진 두 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왕관의 자만심’이란 제목이 붙은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책들과 지성에 대한 자만심’이란 제목이 붙어있었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나온 두 그림의 제목은 인간의 자만심이 비롯되는 두 가지 원천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는 ‘힘’이다. 히틀러는 나치즘이란 집단최면을 통해 폭력적 힘을 소유하고 있었고, 고대의 전제주의 군주들에 의해 저질러진 숱한 만행들도 결국은 그들이 무한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식’이다. 배운 자의 자만은 무엇보다 위험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부정의 근원은 사실 모두 힘 있는 자, 배운 자들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오늘날의 시대를 흔히 지식기반 사회라고 부른다. 또한 사이버 세계의 확대로 오늘날 우리는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지식의 다중화 시대를 살고 있다. 남 보다 조금 더 안다고 자만에 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오늘날 인류의 집단 지성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나친 맹신으로 이어져, 지식 이전의 정서, 머리가 아닌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모두 우리가 함께 빠져있는 지식의 자만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힘’과 ‘지성’으로 가득한 이 시대의 강자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경멸한다. ‘남에게 굴욕감을 주면서 느끼는 만족감’ 그것이 자만의 사악한 결과물인 것이다.
‘권력 의지’(Will to Power)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인간의 자만심을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인위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보상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아들러는 이 열등감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소외감, 과도한 권력에의 추구, 이기주의, 여성에 대한 편견, 공동체 의식의 결여 등이 이것에서 기인한다. 자만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의 부족함을 감추고 그것에 대해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타인에 대한 왜곡된 자만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만은 파멸을 부른다. 파에톤 콤플렉스(Paethon Complex)라는 것이 있다. 파에톤은 태양신 헬리오스와 바다의 님프 클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는 주변에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자랑했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화가 난 파에톤은 헬리오스를 찾아가 자신이 그의 아들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한다. 아들의 고통에 마음이 아팠던 헬리오스는 어떤 부탁이라도 한 가지는 들어주겠노라고 말한다. 그러자 파에톤은 아버지 헬리오스가 모는 태양 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말을 들은 헬리오스는 당황한다. 그리고 그 마차는 자신 외에는 누구도 몰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다른 부탁을 해줄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파에톤이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자 헬리오스는 할 수 없이 마차를 그에게 맡긴다. 그리고 절대로 궤도를 이탈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태양 마차가 대지에서 너무 떨어지면 햇빛을 잃은 땅 위의 모든 것이 생명을 잃게 되고, 너무 가까이 가면 모든 것이 타버리는 불구덩이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자만에 빠져 마차의 고삐를 잡았던 파에톤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에 겁을 먹어 궤도를 이탈하게 되고 대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지상의 모든 것이 불타게 된다. 이를 지켜보던 제우스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파에톤에게 번개를 던지고 그가 몰던 마차는 추락하게 된다. 이 신화의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자만이 초래하는 파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파에톤 콤플렉스는 어린 시절 애정 결핍으로 성장하면서 타인의 인정을 지나치게 갈망하는 강박증을 가리킨다. 콤플렉스는 자만심으로 이어지고 결국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점에서 자만심이 열등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아들러의 관점은 이러한 신화적 배경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중세의 위계 사상이 여전히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이는 그대로 사회적 질서가 되어 부자와 귀족, 부모와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일반적인 가치와 미덕이 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위계의 사회에서 리어는 왕위를 스스로 내놓음으로써 질서를 파괴한다. 권위의 포기는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국가 전체의 안정과 질서를 깨뜨린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은 중세적 위계 사상만을 얘기하고 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시대가 당면하고 있던 권위에 대한 도전, 그리고 중세기적 질서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사화 구조의 취약성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리어의 비극은 개인적인 자만과 질서 파괴의 행위를 넘어서 중세기적 가치가 약화되던 르네상스의 자유분방함을 함께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다.
리어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노년에 접어든 리어는 골치 아픈 국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여유 있는 말년을 지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왕권과 영토를 세 딸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뒤에서 아버지로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려 하였고,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리어의 첫 번째 자만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이 결코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자식은 당연히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스꽝스럽게도 세 딸들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하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크기에 따라 물려받게 될 영토의 크기가 정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고너릴과 둘째 리건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외쳐 리어를 흡족게 한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셋째 코델리아는 언니들의 가식적인 말과 행동에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불행히도 저는 제 마음을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자식 된 도리로
폐하를 사랑합니다. 그것뿐입니다. “ (코델리아, 1막 1장)
막내딸의 대답에 놀란 리어는 “아무 말도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thing comes from nothing.)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코델리아를 다그친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자 분노한 리어는 그녀를 무일푼으로 성에서 내쫓아 버린다. 다행히도 성에 머물며 그녀에게 구애하던 프랑스의 왕이 그런 코델리아의 올곧음을 칭송하며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고 그녀는 프랑스로 떠난다. 그렇게 리어의 비극은 시작된다. 자만에 빠진 인간은 판단력을 상실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거짓된 두 딸의 가식적인 말에 현혹되고 진정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자식을 내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말을 조금 바꾼다면 이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자만에 빠지면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라고 말이다.
‘리어 왕’은 두 개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리어와 딸들 사이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로 진행되고, 다른 하나는 글로스터 백작의 배 다른 두 아들 에드거와 에드먼드의 갈등이 다. 사생아인 에드먼드는 어머니가 정실부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관습에 항거한다. 그는 형을 모함해 쫓아내고 아버지의 작위와 재산을 모두 차지하는 패륜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습에 대한 저항아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연이여, 너는 내 행운의 여신. 너의 법칙에 따르겠다. 왜 빌어먹을
관습에 복종하고 쓸 데 없는 소리에 구속되어 상속권을 박탈당해야
한단 말인가! 사생아라고? 서자라고?...
무엇이 비천하단 말이냐? 야성의 욕정을 못 이겨 남의눈을 피해서 생겨난
인간이니 힘과 능력이 월등한 것은 당연하지. 재미없고, 김새고, 싫증난
잠자리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사이에 생겨난 바보의 무리와는
다르다.” (에드먼드, 1막 2장)
에드먼드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겠다고 한다. 정해진 질서와 섭리의 세계가 아닌 자유롭고 혼란스러우며 무질서한 자연의 법칙.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의 반항적 이념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에드먼드는 악인이었다. 관습을 거부하고, 세상의 도덕을 무시해서가 아니고 그가 지닌 자만심 때문에 그는 악행을 저지른다. 자신의 능력의 우월함을 믿고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인간에게 가하는 자만의 폭행, 그것이 에드먼드의 한계였다. 그래서 그도 다른 의미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글로스터 백작도 에드먼드의 속임수에 넘어가 편견에 사로잡힌 채 진실한 아들 에드거를 버린다. 결국 선악을 구분하지 못한 죄로 두 눈이 뽑히는 고통을 당한 후에야 그도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진실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리어 왕’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자만과 편견에 사로 잡혀 고통을 당하는 두 아버지의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딸의 위선과 가식은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난다. 큰 딸 고너릴은 리어가 부리는 시종의 수를 줄이고 아버지를 경멸한다. 분노한 리어는 성을 나와 둘째 딸에게로 향하지만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리어는 결국 광야를 헤매는 신세가 된다. 믿었던 자식에게 배신당한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오늘날 늙고 힘없는 독거노인들의 삶이 가끔 TV를 통해 비칠 때, 우리는 그들의 자식을 생각한다. 혹시 자식이 없는 걸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 좋은 데 취직하고, 시집, 장가가서 자식들 낳고 잘 산다고 한다. 그런데도 노인들은 혹시 자식들에게 욕이 될까 봐 말을 아낀다. 자기끼리라도 잘 살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초라한 방구석에서 끝 모를 고독감이 밀려올 때 그들은 분명 엄청난 배신감에 몸부림 칠 것이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얼마나 사랑하고 정을 쏟았는데... 그게 그들의 진심이다. 그 배신감과 억울함과 분노가 진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분노와 절망을 오가다가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 있는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이 있나? 이건 리어가 아니야.
리어가 이렇게 걷나? 이렇게 말하나? 그의 눈은 어디 있지?
머리가 둔해졌거나 분별력이 흐려진 모양이군.
하, 이게 꿈이냐 생시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 (리어, 1막 4장)
자식의 배신을 겪은 사람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정체성을 잃은 인간은 이미 존재 이유를 잃은 인간이다. 그렇듯 무수한 배신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는데 왜 자식의 배신에는 스스로를 놓고 마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이제 내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고 있다. 살아계실 때 그들에게서 느꼈던 체온, 그들의 사랑, 그들의 보살핌은 이미 현실의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생명은 언제나 유한한 것이니까. 그리고 문득 눈을 들어 주변을 보니 그들의 자리에 내가, 내 아내가 있고, 과거의 내가 있었던 그 자리에 우리의 아들과 딸이 앉아 있다. 그렇게 생명은 이어져 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생명은 유한하지만 또 무한하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 속에서 나를 본다. 굳이 자식들에게 무슨 책임을 느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세상사가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은 하나가 된다. 그래서 나의 또 다른 내가 날 배신하고 떠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잃는다. 정체성을 상실한다.
정체성(identity)은 본질이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자아. 그것이 나의 본질이다. 서양 사람들은 2,000년의 세월 동안 기독교의 영향 하에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Essence precedes existence)라는 명제를 믿어왔다. 현실에 존재하는 나, 즉 실존 이전에 신에 의해 규정된 나의 본질이 있다는 생각이다. 얼마나 마음의 위로가 되는지! 현실 속에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로 있는, 그래서 때론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절망과 번뇌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실존은 참으로 초라하다. 슬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본질이 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본질이 있다. 살아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그렇게 기독교는 서양 사람들에게 생명의 허망함을 넘어서는 위안과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수천만 명의 생명이 스러진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인들은 그 오랜 믿음을 잠시 접어두는 듯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버러지처럼 죽어가는 생명들. 저들에게 무슨 신의 섭리가 있단 말인가? 무슨 본질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명제를 뒤집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 철학의 명제이다. 우린 그저 실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다. 그냥 ‘던져진 존재’(thrown-out being)로 세상을 살아간다. 너무도 불확실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그들은 과거를 추억한다. 본질이 있다고 믿었던 그 시절을. 그래서 그들은 본질을 찾아 헤맨다. 그렇게 인간의 삶은 실존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본질을 찾아가는 긴 여로이다.
그러나 본질을 찾는 우리의 노력은 허무하다. 결국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2차 대전 후의 작가들은 ‘부조리’라는 상황으로 설명한다. 있지도 않은 것을 찾으려는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아침에 눈을 뜨면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기계적인 삶의 단조로움 속에서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왜 사는지를 자문한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우리의 육체를 바라보며 부조리함을 느낀다. 시간 앞에 파괴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그저 한 때 불꽃을 흩날리며 붉게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힘을 잃고 결국엔 회색의 재로 변해버리는 다 타버린 장작 같은 모습에 우리는 삶의 부조리를 느낀다. 왁자지껄한 광장에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소리친다. 그 속에서 나는 그저 길 잃고 혼자 서있는 아이 같은 모습이다. 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리는 버려진 아이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무리 속에 섞여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서로 눈을 맞추지 않는다.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마주 잡지도 않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킨다. 오늘의 우리 모습이 아닌가? 1990년 대 중반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트 까뮈가 진단한 부조리한 인간군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에 집착하는가? 그래서 그들이 배신하면 그렇게 자신을 상실한 채 방황하는 것인가!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은 독사의 이빨에 물리는 것보다 더 아프다.”는 리어의 말은 그저 육체와 마음의 고통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상실한 우리의 절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광야를 헤매던 리어는 하늘에 호소한다. 신들의 질서를 파괴했던 자책의 외침일까? 리어는 신들을 향해 절규한다.
“신들이여, 보소서. 이 가련한 늙은이를.
나이만큼 슬픔도 커 이렇듯 무참히 짓밟힌 나를!” (리어, 2막 4장)
그리고 극단적인 분노 속에서 소리친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광야의 적막 속에서, 그 고독과 절망 속에서 느끼는 공포였을 것이다. 그는 신이 만든 세상 전부가 무너져 내리길 원한다. 정체성을 상실한 그는 자신이 존재했던 세상의 틀이 깨져버리길 갈망한다.
“불어라 바람아. 뺨을 찢어라! 사납게 몰아쳐라! 불어라!
폭포 같은 비와 태풍이여 쏟아져라...
내 백발을 불태워라! 모든 것을 뒤흔드는 뇌성이여,
이 둥근 세상을 때려 부숴 납작하게 만들어라!
인간 창조의 모태를 부수고,
인간을 만드는 씨를 당장 없애버려라!” (리어, 3막 2장)
이 절망의 극단을 겪으며 리어는 깨닫는다. 고통을 통해 배우는 비극의 전형은 그렇게 다시 세워진다. 광야의 비바람 속을 걸으면서 리어는 생각한다. 이 거대하고 무자비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무엇 때문에 열광하고, 증오하고, 환호하고, 절망하는가! 리어는 비로소 신이 만든 우주 속의 한 점에 불과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옷을 벗으면 인간은 그저 불쌍한 벌거숭이, 두 발 짐승에 불과한 것!” 또 하나의 깨달음은 가치관의 변화이다. 그는 자만을 버리고 겸허함을 배운다. 그리고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이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헐벗고 불쌍한 가난한 이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무자비한 폭풍우에 시달리며, 몸을 누일 집도 없고,
굶주린 배를 쥐고, 구멍 난 누더기를 걸치고, 이 비바람 부는 밤을
어찌 지새우려 하는가! 나는 이제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리어, 3막 4장)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자신이 가진 것을 뽐내며,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인간들을 광야로 보내라! 그들에게 리어의 고통을 겪게 하라! 인간은 왜 고통을 겪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인가! 오늘날 벌어지는 수많은 자만의 행태들을 접하며 생각한다. 그들의 자만심은 어디가 끝일까? 그런데 그들은 그 자만심 때문에 리어가 겪은 고통을 겪기는 할 것인가? 그로써 깨달음을 얻기는 할 것인가? 그러리라 믿는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의 결과가 시간을 초월한 보편성을 가진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그 자만의 대가를 치르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깨닫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그들이 리어처럼 비극적 인물이 될지 아니면 세속의 천박한 패배자가 될 것인지는 그들의 선택이다. 분명한 것은 자만에 따른 몰락이다.
겸허함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된 리어는 이미 이전의 리어가 아니다. 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프랑스 군을 일으켜 달려온 딸과 조우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자만을, 자신의 편협함을 고백하고 코델리아에게 용서를 빈다. 그렇게 화해는 이루어지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확인된다. 프랑스군은 패배하지만 리어와 코델리아의 사랑은 승리를 거둔다. 두 사람의 죽음은 마지막 순간 숭고한 사랑의 확인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반역자 에드먼드, 패륜의 딸들도 죽음을 맞는다. 그 죽음들 가운데 새로운 질서는 회복되고 리어의 비극은 끝을 맺는다. ‘리어 왕’은 리어의 자만과 몰락을 그리고 있지만 오늘의 독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존재의 겸허함, 부모와 자식 간의 무한한 유대,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희생을 통해 확인되는 진정한 사랑 등 시대의 유물이 되어가는 미덕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만에 빠진 오늘의 리어들은 저 광야의 비바람과 절망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