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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l 21. 2020

오셀로, 배신과 질투

셰익스피어 인문학: Othello  

  오셀로는 배신과 질투의 연극이다. 오셀로 장군의 부하 이아고는 승진에서 누락되자 앙심을 품고, 오셀로를 파멸시킬 계획을 세운다. 결국 이아고의 계략에 빠진 오셀로는 정숙한 아내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부관인 카시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오해하여, 그릇된 배신감과 질투심에서 아내를 살해한다. 이 연극에서 오셀로의 비극적 결함은 근거 없는 의심과 질투이다.     

  배신은 믿음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잉태되는 증오는 삶의 모든 가치들을 말살한다. 성서 속에서 유다는 은화 30냥에 예수를 팔아넘긴다. 예수가 만찬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유다는 예수에게 다가가 키스를 한다. 그가 예수임을 알리는 신호였고, 결국 그는 유대교의 제사장들에 의해 체포된다. 그래서 ‘유다의 키스’(Judas’ kiss)는 ‘배신의 키스’를 뜻하게 된다. 믿었던 제자의 배신이다. 예수는 끌려가기 전 날 밤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정하리라.”라고 말한다. 결국 베드로마저 배신했던 그 만찬의 밤. 배신은 인간의 속성인가?     

  권력을 탐한 배신은 역사 속에 너무도 흔히 등장한다. 로마 최고의 권력자였던 시저 장군은 로마제국의 꿈을 품는다. 그는 권력자-장군에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저에 의해 발탁되었던 그의 심복 브루투스는 공화국의 이상에 빠져 있었다. 결코 한 사람의 황제가 모든 힘을 휘두르고 그 권력을 세습하는 제국의 성립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살인을 저지른다. 원로원의 계단 아래서 그는 자신을 믿었던 시저를 참살한다. 권력을 위한 배신은 혈육의 정을 넘어서는 인간의 속성임을 역사는 무수한 예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 하나의 배신은 돈으로 인해 일어나는 배신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아테네의 타이먼’은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에 사로잡힌 채 세상을 마감한 타이먼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그는 부자였고, 주변의 누구든 그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면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사람이었다. 늘 집안에서 잔치를 벌이고 친구들을 초대해 배불리 먹게 했다. 심지어는 남의 돈을 빌려서까지 선행을 베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재물도 끝이 있었고, 결국 남을 위해 재산을 모두 탕진한 그는 그럼에도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도왔던 친구들이 이번에는 자신을 도울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친구들 모두가 등을 돌리자, 그는 사람들에 대한 지독한 배신감과 증오 속에 숲으로 은신한다. 그곳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하던 어느 날 그는 땅 속에 묻힌 엄청난 금덩이를 발견한다. 순간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한다.    

        “이것만 있으면 검은 것도 희게, 추한 것도 아름답게

         악한 것도 착하게, 천한 것도 귀하게, 늙은이도 젊게

         겁쟁이도 용감하게 만들지.

         하, 신들이여, 이것이 왜... 이 황색의 노예  (타이먼, 4막 3장)    

  칼 마르크스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하여 유명해진 구절이다. 사실 금전만능의 사회에서 돈은 모든 것에 앞선다. 그래서 돈을 위해 일하고 돈을 위해 싸운다. 권력에 대한 탐심도 결국은 돈으로 귀결된다. 타이몬의 표현처럼 그렇게 우리는 황색 금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다른 이의 꿈을 빼앗고 그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결국에는 스스로를 망치는 어리석은 인간들. 타이먼은 그 어리석은 인간들을 혐오한다. 그들의 배신을 경멸한다. 그렇게 인간 전체를 증오한다. 배신이 나은 증오가 선량한 그를 극단의 인간 혐오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죽은 후 발견된 그의 묘비명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곳에 나 타이먼이 누워있다. 살아서 모든 인간을 증오했고

         죽어서도 실컷 증오하련다. 그러니 그대 이곳을 지나 

         발걸음을 남기지 않기를. “ (타이먼, 5막 4장)    

  또 하나의 배신은 양심에 대한 배신이다. 폴란드 출신의 영국 소설가 조셉 콘래드는 젊은 시절 선원으로 일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서 바다는 늘 중요한 모티프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로드 짐’(Lord Jim)이란 소설이 있다. 낡은 화물선의 선원이었던 주인공 짐. 선주의 욕심으로 수백 명의 이슬람 순례자까지 태운 이 화물선은 어느 날 밤, 배에 물이 차는 위기를 맞는다. 승객들이 모두 잠들어있던 한 밤에 선원들이 급히 모여 대책을 논의한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승객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선원들만 구명보트를 내려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던 짐은 마침내 구명보트에 올라타고 그 후 깊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늘이 도왔을까? 침몰하던 배는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프랑스 군함에 의해 발견되고, 승객들은 구조된다. 결국 법정에 선 선원들은 법의 심판을 받고 투옥된다. 형기를 치른 짐은 여전히 양심의 가책으로 번민하다가 결국 원주민들만 모여 사는 깊은 오지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문명의 혜택을 전파하는 그를 원주민들은 ‘로드 짐’(로드라는 말은 원래 주인이란 뜻으로 이름 앞에 붙여 귀족이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경칭으로 쓰인다.)이라 부른다. 세속의 번민을 내려놓고 순수한 원주민과 생활하던 그곳에 한 무리의 백인들이 나타난다. 탐욕에 사로잡힌 그들에게서 원주민을 보호하려던 짐은 백인들의 배신으로 결국 원주민 추장의 오해를 사게 되고 그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소설 속 비겁한 선원들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겪었던 상황과 이렇게 닮아있을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양심도, 죄책감도 버릴 수밖에 없는가. 주인공 짐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배신의 짐을 지고, 후회와 가책의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결국 짐과 선원들이 배신했던 것은 자신들의 양심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콘래드는 “우리가 배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양심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의 배신보다 더 크고, 깊은 고통을 남기는 것은 조직의 배신이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조직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배신한다면 그 절망감은 얼마나 클까? 수십 년 간 열심히 일했던 회사에서 해고되고, 더 이상 ‘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직도 더 일해서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을 때, 과연 어찌해야 하는가.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즈맨의 죽음’이란 희곡은 그런 의미에서 배신의 연극이다. 주인공 윌리 로만은 평생 한 회사를 위해 세일즈맨으로 일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여 더 이상 개인의 세일즈가 불필요하게 되자 그는 회사에서 해고된다. 나약한 아내와 아직 철없는 세 아들을 생각하며 그는 젊은 사장에게 외친다.     

        “난 34년 동안 이 회사를 위해 일해 왔소. 그랬건만 이제 보험료조차 치를 수 

         없어요. 오렌지 알맹이만 먹고 껍질은 버린단 말이요? 하지만 사람은 그런 

         과일과는 다르지요.”    

  결국 로만은 자살을 택한다. 생명 보험료라도 타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바람은 물거품이 된다. 자살은 보험료조차 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어떤가. 우리는 흔히 개인의 국가에 대한 배신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반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식민지 시대에 점령국의 지배층에 굴복했던 수많은 민초들. 그들은 과연 배신자들일까? 일제 치하에서 배운 사람, 가진 사람, 높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그들의 망동에 편승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주권을 잃은 힘없는 백성들의 행위는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외세에 굴복하고 부역한 것에 대해 가장 강력한 대응을 한 국가는 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이다. 나치의 지배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독일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전쟁 후 실형을 선고받거나 강제노역, 공민권 박탈 등의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나치 치하에서 보름 이상 신문을 발행했던 신문사들은 이후 모조리 폐간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친일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분명한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배신은 개인에 의해서만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기록 속에는 개인에 대한 수많은 국가의 배신이 기록되어 있다. 전제 군주 시대에는 군주의 탐욕과 자만으로 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고, 견딜 수 없는 힘든 노역에 쓰러져 갔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강요당한 국민들의 희생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2차 대전 끝 무렵, 미국의 함대에 견디지 못하고 패색이 짙었던 일본은 소위 가미카제 특공대라는 것을 조직해 자국의 비행기를 미국의 군함에 부딪히게 하는 자살 공격을 감행했다. 애국과 충성이라는 미명 하에 국가에 의해 자행된 비인간적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개인에 대한 배신의 행위였다.     

  이렇듯 수많은 배신의 행위들은 인간성과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배신의 모습들을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다. 연인의 배신, 친구의 배신, 권력과 재물로 인한 배신 등, 우리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배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었던 부하 이아고의 배신 그리고 그에 의해 거짓으로 만들어진 아내의 배신, 그로 인한 오셀로의 의심과 질투의 감정들을 통해 인간 심성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어떻게 배신하고, 어떻게 타인을 몰락시키며, 어떻게 터무니없는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혀 판단의 눈이 멀 수 있는가를 이아고-오셀로-데스데모나라는 인물들을 통해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오셀로는 무어 출신의 아테네 장군이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용병이었다.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용감하고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그는 아테네의 궁에서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그의 피부색은 검은색이었고, 정치적인 기반이 없는 외톨이였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백인 귀족의 딸 데스데모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은 오셀로의 삶에 비춘 빛이었다. 그녀는 외국인 그것도 흑인인 오셀로와의 만남을 반대할 아버지 몰래 오셀로와 결혼한다. 셰익스피어의 극에서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을 당하는 연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희극에서는 그러한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이르는 해피엔딩이지만 비극에서는 언제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집안 간의 원한으로 비극적 사랑의 종말을 맞이한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렇지만, ‘햄릿’의 오필리어의 경우도 아버지 폴로니우스와 오빠 레어티스 모두 왕자인 햄릿과의 사랑을 반대한다. 그리고 결국 오필리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햄릿이 휘두른 칼에 아버지가 죽고, 결국 그녀의 자살 이후 오빠인 레어티스도 햄릿과의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의 끝에 늘 죽음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사랑은 시작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오셀로에 대한 이아고의 배신은 오셀로가 자신의 부관으로 이아고가 아닌 카시오를 임명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아고는 자신이 능력 면에서 카시오를 앞선다고 믿었다. 따라서 카시오의 승진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고, 오셀로에 대한 그의 믿음과 존경심은 불신과 증오로 변화한다. 자신만이 옳고, 자신만이 더 크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근거 없는 자만심이라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의 우리도 기대와 달라진 현실 앞에 얼마나 좌절하고, 분노하고, 앙심을 품는가. 하지만 이아고의 문제는 그러한 마음속의 악의가 증오와 복수로 이어진 데에 있었다. 그는 오셀로의 파멸을 이끌어내기 위해 기꺼이 거짓의 가면을 쓴다.       

        “그를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사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를 따를 뿐이야.”

                                                   (이아고, 1막 1장)     

  배신의 시작은 거짓된 말과 행동으로 시작된다. 이아고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진심으로 오셀로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표현대로 자신의 ‘거짓된 심장을 드러내어 새에게 쪼여 먹히지 않기‘ 위해서이다. 복수의 대상을 안심시키고 경계를 늦추도록 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다. 이아고는 그렇게 선의의 가면을 쓴 무서운 배신자로 오셀로 앞에 미소를 뿌린다. 그리고 복수의 계략을 시작한다.   

  이아고가 선택한 첫 번째 계략은 ‘이간질’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 로데리고를 시켜 데스데모나의 아버지에게 그녀와 오셀로의 관계를 폭로한다. 데스데모나를 마음에 두고 있던 어리석은 로데리고는 쉽사리 이아고의 꼬임에 빠진다. 그리고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러밴쇼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따님께서는 떠돌이 외국인에게 의무와 아름다움과 지성과 행운, 

         모든 것을 몽땅 다 맡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로데리고, 1막 1장)    

  분노한 브러밴쇼는 즉각 궁정에서 귀족회의를 열고 오셀로를 불러 비난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용맹스럽고 뛰어난 장군이라 하더라도 무어 출신의 흑인이었던 오셀로에게 딸을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귀족회의에서 탄핵을 당하던 오셀로 앞에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가 등장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아버님은 제가 의무를 다해야 할 제 

         주인이시고 저는 이제껏 아버님의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겐 남편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외할아버지보다 아버님을 

         사모하시고 아버님을 섬기셨던 만큼, 

         감히 말씀드리면 저도 제 남편인 무어인 

         이분께 제 의무를 다하겠어요.”  

                                (데스데모나, 1막 3장)    

  딸로서 아버지에 대한 의무와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의무가 충돌하면 한 여인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오늘날의 여성들에게는 별로 당혹스러운 질문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제법 많은 한국 여성들이 가졌던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시절, 그 오랜 옛날에 데스데모나는 당차게 아내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녀의 등장과 선언으로 이아고의 계책은 실패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딸의 당돌한 태도에 마주한 브러밴쇼는 어떠했을까? 사랑을 찾아가는 딸의 모습이 대견스러웠을까? 아니면 딸의 배신에 절망했을까? 딸을 둔 오늘의 아버지들은 또 어떨까? 브러밴쇼는 궁정을 나서며 오셀로에게 악담처럼 한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저 애를 눈여겨보시오.

         제 아비를 속인 년이니 그대를 속일 수도 있겠지.” 

                                                (브러밴쇼,  1막 3장)    

  아버지의 말치고는 악담을 넘어 마치 저주처럼 들린다. 자신에게 했듯이 데스데모나가 남편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버리고 배신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은 분노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거의 증오에 가깝다. 또한 그것은 극의 전개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고, 파국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은 의심의 씨앗을 뿌려놓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로써 이아고의 두 번째 계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셀로의 마음에 의심의 싹을 틔우는 일이다. 의심은 판단의 눈을 흐리게 하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가 상대의 마음에 커다란 의심과 의혹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아고의 계략은 다음과 같은 그의 한 마디로 요약된다.     

        “카시오가  데스데모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셀로의 귀에 속삭이는  거야”    (이아고, 1막 3장)    

  그렇게 계략은 두 번째 단계로 옮겨간다. 의심의 씨앗은 한 번 뿌려지면 스스로 줄기를 키우고 가지를 뻗으며 뿌리를 내린다. 이아고는 오셀로가 자리를 비운 가운데 그의 업무를 대신하던 부관 카시오를 상대로 먼저 계략을 꾸민다. 즉 그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게 만들고 그 사실을 오셀로에게 알려 그의 신뢰를 잃게 하는 것이었다. 부관의 직위에서 일시적으로 해임된 카시오는 좌절한다. 그는 동료인 이아고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그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가볍게 여기는 명예에 대해 생각나게 한다. 누군가 그랬던가? ‘돈을 잃으면 적게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은 것을 잃은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의 끝은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로 끝나지만 돈과 권력에 앞서는 것이 명예라는 생각은 오랜 믿음이었다. 카시오는 절망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명예야, 명예. 나는 명예를 잃었어! 

         나는 내 몸에서 불멸의 것을 잃었어. 나머지는 짐승도 지닌 것뿐. 

         이아고, 내 명예, 나는 내 명예를 잃었어.”  (캐시오, 2막 3장)    

  ‘내게 있는 불멸의 것. 그 외의 다른 것은 짐승도 갖고 있는 것.’ 그것이 명예이다. 카시오는 장교로서의 명예뿐 아니라 오셀로의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아고의 속내를 모르는 카시오는 그에게 매달린다. 이아고는 카시오에게 오셀로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인 데스데모나뿐임을 넌지시 비춘다. 카시오는 데스데모나를 찾아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런 카시오를 보며 데스데모나는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남편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셀로의 관용을 간청한다. 여기에 이아고의 계략이 숨겨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든 후 이아고는 브러밴쇼가 했던 말을 떠오르게 하는 의심의 씨앗을 오셀로의 마음속에 심었던 것이다.     

        “부인을 조심하셔야죠. 카시오와의 사이 말입니다.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안심하는 것도 아닌 그런 눈으로 

         잘 살펴보시지요... 그렇게 속 다르고 겉 다르게 꾸며서 

         아버지의 눈도 캄캄하게 멀게 하고는, 마술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부인이십니다. “    (이아고, 2막 3장)    

  이아고의 다음 계략은 인간의 약점, 열등감을 이용하는 비열한 수법이었다. 이아고의 교묘한 속삭임에 판단력이 흐려진 오셀로는 아내의 부정한 행실에 대해 의심을 넘어 그것을 거의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숨겨왔던 열등감이 고개를 든다. 멋쟁이 백인 귀족들로 가득한 궁정에서 초라한 자신을 그녀는 왜 사랑한 것일까? 그 사랑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버지를 배신했으니 남편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셀로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비참한 생각을 토로한다.     

        “내가 흑인이어서, 사교계의 멋쟁이들처럼 

         대화도 매끄럽지 못해서, 아니면 이제 나이 들어 

         쇠잔해져서  -하지만 내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그래서 그녀가 날 버린 건가. 

         난 속고 있었어. 이제 나의 위안은 그녀를 증오하는 것뿐. 

         오 저주받을 이 결혼,

         아름다운 그녀를 내 것이라 생각했건만

         결국은 남들의 욕심이나 채우는 것이란 말인가.”   (오셀로, 3막 3장)    

  이아고의 비열한 계책의 희생자가 된 오셀로의 모습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갖게 한다. 셰익스피어는 왜 의심과 질투심에 빠져 아내를 살해한 못난 남자를 흑인으로 설정한 것일까? 등장인물 모두가 백인인 가운데 주인공 한 사람만이 흑인인 무대를 상상해 보라. 그 그림은 1980년대 등장한 탈식민주의 문학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서양의 고전이 유럽과 백인 중심으로 되어있고, 그 외의 인종은 백인들의 숨기고 싶은 자아---음탕하고, 어리석고, 비열한---를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 탈식민주의의 전제이다. 서양 고전의 정점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조차도 백인 우월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인가. 문득 오늘날 인종 분쟁의 씨앗은 아주 오래전부터 잉태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아고의 마지막 계략은 증거의 조작이다. 그는 자신의 아내 아멜리아를 시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선물했던 아름다운 손수건을 훔쳐낸다. 그리고 그것을 캐시오의 방에 놓아둔다. 이후 이아고는 각본에 따라 카시오와 그의 숨겨진 애인 비안카를 이용해 훔친 손수건을 보여줌으로써 오셀로로 하여금 아내의 부정을 확신하게 만든다. 이성을 잃은 오셀로는 마침내 아내를 목 졸라 죽인다. 잠든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오셀로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한번 따버리면 이 장미는 다시는 

         생기를 되찾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버리겠지. 

         나무에 달려있을 때 향기를 맡자.

         … 죽여 놓고 사랑하겠다.

         … 사랑하기에 벌을 주는 것이다.”   (오셀로, 5막 2장)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그렇듯 자신을 사랑한 여인. 현명하고 정숙한 아내. 그녀를 살해하기 직전 이 바보 같은 사나이는 “죽여 놓고, 사랑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아고는 자신의 계략을 완성시키기 위해 카시오를 습격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인간의 의심과 질투가 얼마나 하찮은 이유에서 비롯되며 그에 빠지는 인간의 본성은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간질과 의심의 씨앗, 열등감의 자극과 증거의 조작은 결국 나약한 한 인간을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다. 이아고의 계략은 결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전형적인 수법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의해 조종된다. 남을 음해하고 거짓을 말하는 인간을 구분하지 못한다. 나에게 아첨하고 충성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근거 없이 비난하고 모함할 때, 왜 우리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지 못하는 것일까? 악인은 그런 인간의 나약함을 이용한다. 우리가 남에 대한 칭찬보다는 비난의 말에 더 귀 기울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오셀로는 자신이 이아고의 계략에 빠졌음을 깨닫게 되고 후회와 절망의 극한에서 절규한다.    

        “오셀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 악마들이여 모진 바람 속에 나를 휘몰아 다오.

         유황불로 태워다오. 저 짙은 불바다 속에 던져다오.

         아,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 당신은 죽었구려.

         아, 아, 아!”    (오셀로, 5막 2장)    

  오셀로는 그렇게 배신당하고, 의심하고, 열등감에 빠져 판단력을 상실한 채 아내를 죽이고서야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감, 불신, 질투, 경솔함 등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알게 된다. 왜 인간은 죄를 저지르고 나서야 후회하고 깨닫게 되는 것일까? 후회와 절망 속에서 오셀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악인 이아고도 그의 비열한 계략이 드러나 사형을 면치 못한다. 그렇게 오셀로의 비극도 모두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내 안의 오셀로를 경계하라! 거짓에 귀 기울이고, 이유 없이 의심하고, 쉽게 극단에 빠지는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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