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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l 19. 2020

맥베스, 탐욕의 아포리아

셰익스피어 인문학: Macbeth

맥베스, 탐욕 이후...    

  ‘맥베스’는 탐욕에 관한 연극이다. 권력에 대한 탐욕, 왕위에 대한 탐욕이 용맹하고 충성스러웠던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를 어떻게 반역의 살인자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탐욕의 대가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그려내고 있다. 맥베스의 비극적 결함은 바로 권력에 대한 탐욕이었고,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주었다는 죄로 신들의 땅 올림푸스 산 절벽에 쇠사슬로 묶인 채 500년의 세월을 보낸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거대한 독수리가 달려들어 그의 내장을 파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장은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끝 모를 고통. 그것이 그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탐욕은 프로메테우스의 내장과도 같은 것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래서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는 욕심. 나이가 들어서 모든 것을 내려놨다고 말하지만, 작은 이유만 찾아낼 수 있으면 또다시 저 깊은 곳에서 은밀히 올라오는 탐욕, 그래서 우리는 늙은이의 욕심을 노탐이라 부른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는 탐욕을 셰익스피어는 맥베스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은 그리스어로 ‘막다른 골목’을 뜻하는 아포리아이다. 결코 벗어날 길이 없는 'No Way Out!'     

  로마의 극작가 세네카는 이렇게 말한다. “탐욕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본성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사랑도, 우정도, 미움도, 시기심도 탐욕에 비하면 사소할 뿐이다. 그렇게 탐욕은 우리의 본성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탐욕은 하도 깊이 뿌리 박혀서, 여름처럼 때가 되면 지나고 마는 정욕보다 더 완강하죠. “ 맥베스 5막 3장, 맥더프의 대사이다. 정욕보다 더 완강히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탐욕은 과연 어떻게 맥베스를 사로잡은 것일까?     

  ‘맥베스’는 세 마녀들의 대사로 막이 오른다.     

마녀 1 : 언제 우리 다시 만나지? 

         천둥, 번개, 빗속에서?

마녀 2 : 소동이 끝나면,

         싸움이 지고 이기면.

마녀 3 : 해가 지기 전일 거야. 

마녀 1 : 어디에서? 

마녀 2 : 광야에서.

마녀 3 : 거기서 맥베스를 만나야지.

............

마녀들 함께 : 옳은 것이 그른 것이고, 그른 것이 옳은 것이지.

              안갯속, 탁한 공기 속을 뚫고 날아가자.         (1막 1장)     

  마녀들의 이 대사는 맥베스가 겪게 될 운명의 서곡이다. ‘천둥, 번개와 비. 소동과 싸움,’

‘해 진 뒤 광야에서‘와 같은 표현들은 맥베스 앞에 놓인 어두운 미래에 대한 암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의 첫 부분, 그들의 대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 옳은 것이 그른 것이고, 그른 것이 옳은 것이다.‘(Fair is foul, foul is fair.)라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 비평가들은 그것에 대해 ’ 실재와 외관의 차이,‘ ’ 가치관의 혼동‘ 등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어떤 맥베스가 진짜 맥베스일까? 용감하고 충성스러웠던 맥베스? 왕을 시해한 반역자 맥베스? 우리는 종종 한 인간 속에 서로 다른 자아를 발견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칼 융의 말에 따르면 ’ 인간은 100개의 가면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각기 다른 가면을 꺼내 쓴다. 아버지의 가면, 자식의 가면, 남편과 아내의 가면, 직장에서의 가면. 우리는 무수한 가면을 쓰고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연극의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였다. 그들의 가면은 한 배우가 여러 가지 역할을 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등장인물의 사회적 위치나 혹은 희로애락과 같은 그들의 내면적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이 쓴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 불렀는데, 칼 융은 그 단어를 심리학적 용어로 차용해 인간의 ’ 외적 인격‘ 즉 겉으로 드러난 인격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우리의 외적 인격은 쓴 가면에 따라 달라진다.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철부지 아이처럼 굴 수는 없지 않은가. 근엄한 교사의 가면을 쓰고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대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렇게 우리는 각기 다른 상황, 각기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를 변화시킨다. 맥베스는 탐욕에 의해 자신의 외적 인격뿐 아니라 내면의 자아까지도 변화한다. 그는 왕에 대한 충성심 외에도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한 인간은 탐욕이라는 본성을 통해 두 개의 다른 자아로 분화된다. 두 가지 모습 모두가 맥베스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외면은 실재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우리 인간의 참모습일지 모른다.   

  서양 사람들의 사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직선적 사고. 그것은 오랜 기독교 사상에 의한 것인데, 성경의 구조는 창세기에서 시작해 최후의 심판으로 끝이 난다. 시작이 있으면 결국 끝이 있는 직선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동양의 사고는 원형적이라고 한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사상. 그래서 불교의 윤회는 끝없는 생명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하나는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이란 것인데, 모든 개념에는 대립되는 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정의가 있으면 불의가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으며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두 개의 항은 대립적으로 존재하여 다른 하나의 의미를 강화시킨다. 문제는 이 두 항 가운데 왼쪽의 것, 선이나 빛, 정의와 삶이 대립되는 개념들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보다 선, 어둠보다는 빛이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녀의 경우는 어떠한가? 남성이 여성보다 더 긍정적이거나 우월하다는 것인가?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그러한 논리가 힘을 지닐 수도 있겠지만, 남녀에 대한 이런 차별적 의식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래서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그것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20세기 후반의 후기구조주의 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예술적 경향은 고정된 기준의 상실을 바탕에 두고 있는 생각이나 흐름을 나타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있고, 가치의 기준을 잃고 방황한다. 그래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위성처럼 방황한다. 한때 그렇게 확실히 믿었던 많은 개념들이 해체되고 흩어진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중심과 변방이 따로 없고, 고급과 저급이 구분되지 않는다. 30~40년 전만 해도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들은 팝 가수들과 어울리는 것이 금기시되었었다. 그러나 이태리의 테너 파바로티가 영국 록밴드의 가수 겸 베이스 주자인 스팅과 함께 노래하고, 도밍고가 팝 가수들과 함께 하는 소위 크로스오버(crossover)가 가능해진 것도 고급의 예술과 저급의 예술에 대한 경계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탈 중심의 우주(decentered universe)에서는 판단에 대한 고정된 준거(fixed standard)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현대는 발아래 딛고 설 기반을 상실한 채 끝없이 침잠한다.      

  오늘날 우리는 가치의 판단에 대한 명확한 잣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사실 우리의 삶에는 분명히 구분되지 못하는 많은 가치들이 있다.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판단의 기준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예들을 제시하고 있다. 열차를 몰던 기관사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을 깨달았을 때 선로에서 일하던 몇 사람의 인부를 발견한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 선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그 방향에 한 사람의 인부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몇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은 과연 옳은 일인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오랜 시간 고립된 사람들 중 일부가 생존한 방법이 먼저 죽은 사람들의 살을 먹고 버틴 것이라면 그것은 옳은 일인가? 우리 주변에 판단이 어려운 상황은 의외로 많다. 원숭이의 심장을 이식받은 아이가 몇 주를 살다가 사망한 경우, 그 종(種)의 혼란은 어쩔 것이며, 인간을 위해 원숭이는 죽여도 괜찮은 일인가. 우리는 그 행위들에 대해 전적으로 비난하기도, 동의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마주치게 된다. 그렇게 현대의 우리는 가치의 혼란, 판단의 어려움에 직면해 불확실성이라는 어둠 속을 헤맨다.     

  현대의 철학자, 사회학자들의 이러한 이야기가 400년 전 작가인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 줄에서 이미 예견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옳은 것이 그른 것이고, 그른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구절은 실재와 외관이 다를 수 있다는, 인간과 삶의 속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선악으로 구분되는 가치가 언제나 불변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문학은 시공을 초월한 생각의 명제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난해한 이론이 아닌 한 인간과 그의 실제적 삶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그러한 예들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맥베스의 탐욕은 마녀들의 한 마디 예언에서 비롯된다. “장차 왕이 되실 분.” (You shalt be the king hereafter.)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던 그에게 던져진 그 짧은 예언이 맥베스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탐욕은 언제나 작은 불씨에도 타오르는 인간의 본성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러한 탐욕의 마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마음도 똑같은 욕망으로 타오르게 한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맥베스는 그 사실을 아내에게 편지로 전한다. 맥베스 부인은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남편보다 더욱 강력한 열정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살인의 의지로 불타오른다. 왕을 죽여야 남편이 왕이 될 것이 아닌가. 그때 전령이 도착해 던칸 왕이 맥베스의 승리를 치하하기 위해 그의 성에서 하룻밤 묵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하늘이 그녀에게 기회를 준 것일까? 살인의 의지에 사로잡힌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까마귀까지도 목쉰 소리로 던컨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양 저렇게 

        울어대는구나!  자, 너희들 살인의 음모에 따르는 악령들아, 어서 와서 나의, 

        이 여자의 마음을 없애 버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마음으로 가득 차게 해 다오. 전신의 피를 혼탁하게 하여 연민의 정이 얼씬도 

        못하게 하고 양심의 가책이 나의 흉악한 결심을 뒤흔들거나, 혹은 그 

        가책으로 인해 실행을 단념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다오.”   

                                                         (맥베스 부인, 1막 5장)    

  그녀는 악령을 불러내어 잔인해지기를 갈구한다. ‘나의, 이 여자의 마음을 없애버리고’(Unsex me here.)라는 표현은 버려진 여성성을 상징한다. 탐욕은 모든 가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맥베스의 탐욕은 그의 아내에게로 전이되고 결국 그녀의 여성성을 파괴한다. 탐욕은 전염된다. 나의 탐욕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전염되고 그의 본성을 파괴한다. 맥베스 부인이 스스로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녀의 탐욕은 여성성-정체성의 왜곡에 더해 모성의 파괴로까지 이어진다.        

       “저는 아기에게 젖을 먹여 보아서 젖을 빠는 아기들이 얼마나 귀여운가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만일 당신처럼 일단 그렇게 하기로 맹세를 

       하였다면, 그 갓난아기가 제 얼굴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을지라도 

       그 보드라운 잇몸에서 젖꼭지를 잡아 빼어 아기의 머리통을 박살 낼 수 있어요. “

                                                           (맥베스 부인, 1막 7장)    

  ‘메데이아’,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 보이는 모성의 파괴가 사랑의 열정에 의한 것이었다면, ‘맥베스’에서는 탐욕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남편이 왕이 된다는 생각, 자신이 왕비가 된다는 흥분감이 그녀를 여성성과 정체성, 모성까지 상실한 괴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젖을 빠는 아이의 머리통을 부수는 어머니를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맥베스 부인은 권력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여성의 가장 중요한 가치 모성을 저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탐욕은 구체적인 살인의 계획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정작 맥베스는 왕을 살해하기에 앞서 망설인다. 권력을 추구하는 본성 옆에 함께 존재하는 양심, 충성심, 두려움 등의 감정 등이 작용한 것이다. 탐욕이 첫 번째의 감정이었다면 이어지는 것은 망설임과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맥베스는 고뇌한다.    

      “그를 살해하는 날엔 그의 높은 덕망이 나팔의 혀를 가진 천사와도 같이 

       그 대죄를 천하에 퍼뜨릴 것이다.  그리하여 연민의 정이 갓 태어난 

       천진난만한 아기의 모습이나, 혹은 보이지 않는 천마에 앉은 천사의 모습을 

       하고 그 악행을 만인의 눈에 불어넣어, 그 눈물로 바람마저 자게 할 것이다.  

       아, 나에게는 내 흉악한 계획의 옆구리를 걷어찰 박차가 없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날뛰는 야심뿐, 그것도 너무 뛰어올라 자꾸만 저편으로 넘어 떨어지려고 

       할 뿐이다. “  (맥베스 부인, 1막 7장)    

  맥베스는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을 믿고 아끼는 던칸 왕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충성스러운 장군이었으니까. 하지만 권력을 찬탈하는 반역자의 가면 또한 그의 모습이다.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마녀들의 예언을 듣는 순간, 이미 맥베스의 야심은 끓어올랐고 그 불꽃이 그의 아내에게 옮겨져 갔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두 사람은 탐욕을 매개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맥베스는 왕을 죽인다. 잠들어 있는 그의 가슴에 단검을 찔러 넣는다. 그렇게 그는 살인자가 되고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화려한 왕관을 쓴 맥베스, 그는 이제 질서 정연하게 이어진 ‘존재의 사슬’(Chain of Being)을 끊어버리는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브런치 글, 셰익스피어의 비극 참조)  

  죄의 대가는 무엇일까.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cles)이란 말이 있다. 기원전 4세기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오스 2세가 측근인 다모클레스를 연회에 초대한 후 말총에 매달린 날카로운 칼 아래에 앉힌다. 군주의 자리가 언제 떨어질지 모를 칼 아래에 있는 것처럼 위험과 불안 속에 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왕이 되는 순간 맥베스도 곧 떨어질 칼 아래 앉은 불안감에 빠진다. 2막 3장에서 맥베스는 아내에게 그 불안감을 토로한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소. ‘더 이상 잠은 없어. 맥베스가 잠을 죽였으니까.’ 죄 없는 잠을 말이오.”(2막 3장) 잠 못 드는 맥베스는 왕을 살해한 단검, 피 묻은 손의 환영에 시달린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어색함과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왕을 살해한 후 방에서 뛰쳐나온 맥베스는 피 묻은 자신의 두 손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문 두드리는 저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걸까? 왜 이러지, 작은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라다니!  아, 이 손은 뭐지?  하, 눈알을 빼낸 것 같구나! 

        위대한 바다의 신 넵튠의 대양, 그 물로 이 손의 피를 깨끗이 씻을 수 있을까? 

        아니지, 이 손이 오히려 저 넓고 넓은 푸른 바다를 빨갛게 물들여 핏빛으로 

        바꾸어 놓을 거야. “  (맥베스, 2막 2장)    

  맥베스의 불안감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특히 마녀의 예언을 함께 들었던 동료 장군 뱅코우에 대한 의심은 극에 달한다. 당시 마녀들은 맥베스에게 왕의 자리를, 뱅코우에게는 그의 자손들에게 왕위가 이어지리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맥베스는 왕이 된 후 그 예언을 떠올린다. 그렇게 두려움과 가책 속에서 얻은 왕관이 남의 자식들에게 넘어간단 말인가. 나에 대한 예언이 맞았으니 뱅코우에 대한 예언도 맞을 것이 아닌가. 결국 맥베스는 자객을 동원해 그를 암살하지만 그의 아들을 죽이는 것에는 실패하고 만다. 예언은 실현되는가? 맥베스의 불안과 의심은 이제 절정을 향한다. 마녀들의 예언이 실현될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뱅코우의 아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맥베스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의심과 불안의 감정을 촉발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이 중요한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갖가지 부정적인 본성들을 끌어내는 구실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나도 어쩔 수 없었다니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핑곗거리를 만들어내는가? 결국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에 기대어 행동하고, 그것에 의해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히고 마침내 두려움에 빠져 번민한다. 뱅코우를 살해한 후 맥베스는 자신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이렇게 토로한다.    

       “우리는 뱀에게 상처만 입히고 죽이진 못했소. 그 뱀의 상처는 언제인가는 

        아물어서 치유될 것이며, 괴로운 상처를 입힌 우리는 반대로 그 독사의 이빨에 

        언제 물릴지 모를 일이오. 차라리 이 우주가 산산이 부서지고 천지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공포 속에서 음식을 먹고 밤마다 그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자고 싶지는 않소. 양심의 가책으로 미칠 듯한 불안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서, 우리가 우리의 평화를 위해 영원한 평화의 세계로 보내 버린 그 죽은 자와 

        같이 있는 편이 훨씬 낫겠소. “  (맥베스, 3막 2장)     

  탐욕을 만족시킨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 커서 차라리 자신이 죽인 자들처럼 죽음 속에 있는 것이 더 낫겠다는 맥베스의 고백은 탐욕의 충족이 결코 궁극적인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죽은 줄 알았던 뱅코우의 유령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맥베스는 이성을 잃는다. 그리고 그 광기와 잔인함은 잉글랜드로 달아난 파이프의 영주 맥더프에게로 향한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몰살시킨 맥베스는 또다시 깊은 불안감에 빠져 자신의 행위에 대한 구실을 찾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에게 예언을 주었던 마녀들을 다시 찾아간다. 확인하고 싶었을까? 또 다른 예언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을까? 마녀들은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맥베스는 안전할 것이며, 여자가 낳은 자는 누구도 맥베스를 죽이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그 예언으로 안전을 보장받은 맥베스는 자신의 광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을 합리화한다. 하지만 마녀의 외침은 유혹의 속삭임일 뿐, 결국 맥베스의 몰락은 시작된다. 맥베스가 보았던 손에 묻은 피는 죄의식으로 미쳐버린 맥베스 부인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다.        

       “없어져라, 이 망할 얼룩아!  없어지라니까!  한 시 두시, 아니, 그러면 이제 

        단행할 시간이다. 지옥은 컴컴하기도 하다. 아니, 여보, 뭐라고요?  무인이 

        겁을 내다니요? 누가 알까 봐 두려운가요? 아무도 권력을 시비할 자는 없어요.  

        하지만 그 늙은이에게 이렇게 피가 많은 줄은 몰랐어요.

        .................

        파이프의 영주에겐 아내가 있었지. 한데 지금은 어디 있지?  아니, 이 손은 

        영원히 깨끗해질 수 없단 말인가?  그만 하세요, 여보, 이젠 그만 하세요.  

        그렇게 떨다간 이것저것 다 망쳐 놓는단 말이에요.     (맥베스 부인, 5막 1장)    

  피의 환영, 손에 묻은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 양심의 가책은 영원히 들고 가야 할 죄의 무게일 뿐이다. 그렇게 남편의 탐욕에 물들었던 그녀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들은 맥베스는 탐욕에 빠진 삶의 종말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왜 죄의 고통과 후회는 깨달음보다 먼저 오는가? 맥베스의 독백은 탐욕으로 몰락한 삶에 대한 통렬한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자기가 맡은 시간 동안 뽐내고 조바심치다가 결국 잊히는 

       가련한 배우. 인생은 이야기, 바보들의 이야기. 소리와 분노는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  (맥베스, 5막 5장)    

  맥베스의 탐욕은 살인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그의 마음에 불안과 의심을 남긴다. 그리고 그 의심은 두려움으로 변화되어 이성을 잃고 광기와 잔인성으로 변화한다. 결국 탐욕의 끝은 몰락. 아내의 죽음 앞에서 얻게 되는 삶에 대한 깨달음. 비극은 고통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맥베스가 살해한 던컨 왕의 아들 말콤과 그의 장군 맥더프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이 맥베스의 성으로 쳐들어와 그의 목을 베고, 망명했던 말콤 왕자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다.   말콤의 군대는 버넘 숲의 나뭇가지로 위장한 채 맥베스의 성으로 쳐들어 왔고, 맥베스의 목을 벤 맥더프는 제왕절개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마녀의 두 번째 예언이 실현된 것이었다.  탐욕으로 빚어진 비극. 마침내 고통과 죽음을 통해, 혼란의 세계에 새로운 도덕적 질서가 회복된다.  그렇게 셰익스피어는 한 인물의 야심과 몰락을 통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본성인 탐욕과 그로 인해 초래된 감정의 흐름들, 깨달음, 죄의 대가와 질서의 회복이라는 비극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당신은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크던 작던 우리는 스스로의 욕심을 충족시키며 산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꿈이, 노력이, 평범했던 삶이 파괴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린 불안하다. 그리고 애써 자신을 합리화하고 가책에 대해 눈을 감는다. 맥베스는 결국 나 자신이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악과 선이 공존하는 그런 비겁한 ‘나’가 맥베스를 통해 거울처럼 비친다. 그래서 오늘도 거리에는 어두운 가면을 쓴 맥베스가 배회한다.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덮쳐 올 맥베스의 그림자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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