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문학: Romeo and Juliet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사랑의 열정.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그 설렘과 긴장, 환희와 고통은 마치 열병처럼 연인들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젊은이들의 사랑을 치료해야 할 ‘질병’이라 부르고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그것을 ‘광란’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서양 사람들은 운명을 태어날 때부터 미리 결정된 모이라이적 운명, 그리고 자기 속의 무언가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끌어가는 다이몬적 운명으로 나눈다. 사랑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던가. 하긴 인연이라는 것,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로 그 사람을 만나 설렘을 느끼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한편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더 큰 고통 속에 빠지고 번민하는 것은 의지만으로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이 두 가지 운명이 다 작용한다. 두 사람이 서로 적대하는 몬태규 가와 캐풀렛 가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것은 모이라이적 운명이지만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상대에게 빠진 것은 다이몬적 운명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에는 시련과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차가운 키스 그리고 죽음으로 마감된 이 젊은 영혼들의 사랑은 오랜 세월에 걸쳐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전형이 된다.
에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이다. 아름다운 젊은 남성의 모습으로 어깨에 날개가 달리고 손에는 활을 들고 있다. 이 에로스가 로마 신화에서는 큐피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스의 에로스와는 달리 큐피드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똑같이 활을 들고 있다. 이 사랑의 신들은 두 가지 화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금촉의 화살 다른 하나는 구리촉의 화살. 금촉의 화살을 맞은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구리촉의 화살을 맞으면 그 사랑은 식어버리고 만다. 사랑의 열정은 식기 마련이라는 고대 신화 속의 은유일까? 하지만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그 사랑이 끝날 수 있음을 믿지 않는다.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Stendhal)은 어느 날 소금 광산을 방문한다. 그리고 구덩이에 놓인 나뭇가지에 소금의 결정이 붙어 햇빛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며칠 후 다시 찾은 그곳의 나뭇가지는 소금의 결정이 모두 사라지고 검은 가지의 흉한 모습만 드러내고 있었다. 스탕달은 문득 사랑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때 아름답게 빛나다가 결국은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남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인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시작과 끝을 ‘결정화’와 ‘탈 결정화’라 부른다. 아름다운 결정을 이루다가 결국은 흩어지는 그런 허망함. 가끔 우리는 그렇게 사랑의 종말을 확인한다. 사랑이 호르몬의 장난이라고 여기는 현대의 과학자들은 심지어 사랑의 유효기간을 말하기도 한다. 미국 코넬 대학의 한 연구팀은 그 사랑 호르몬이 유효한 것은 개인적인 차이를 고려하여도 30개월을 넘지 못한다고 발표하였다. 사랑의 유효기간? 그건 결국 열정이 식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열정 이후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남녀 간의 사랑이 그리고 결혼이 열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이 사라진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라고 자문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의 연시 ‘소네트’(Sonnet)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한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모든 것이 변화하던 시기였다. 르네상스로 이동하면서 신에 대한 경외심과 기독교적 교리, 질서와 위계 사상 등 중세의 사상들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그리고 인간이 얻어낸 이성과 그로 인한 자유로움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16세기 초반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것은 우주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초래하였다.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믿었던 이태리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1564년에 태어난 동갑내기였다. 우주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16세기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가치관과 인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11세기 초반에 시작되어 200여 년 간 계속되었던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당시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동방의 사상, 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결국 이 새로운 사상과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세상을 알게 하고, 변화의 당위성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셰익스피어는 한 가지 영원히 변치 않을 무언가를 꿈꾸었다. 우주가 변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무언가,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는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믿었고, 갈망하였다. 그의 소네트 116번은 사랑의 불변성을 이렇게 묘사한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혼을
방해하지 않게 하소서. 구실을 찾았다고
변하는 사랑, 버릴 거리를 찾았다고 휘어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을.
오, 아니지. 사랑은 폭풍우에 마주쳐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히 고정된 표식;
사랑은 모든 표류하는 배들의 길잡이 별,
높이는 잴 수 있어도 그 가치는 측량할 길 없는.
장밋빛 입술과 뺨이 시간의 굽은 낫 앞에 사라진다 해도
사랑은 시간의 노리개가 아닌 것을.
사랑은 짧은 몇 시간 몇 주에 변하지 않고
운명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참아내는 것.
이것이 틀린 말이고 그렇게 증명된다면,
나는 결코 사랑의 글을 쓰지 않으리.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리.
사랑은 ‘시간의 노리개’가 아니라고 외치지만 셰익스피어 역시 사랑도 변화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 ‘이 세상에 결코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실은 사랑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하기 전에 끝나버린 사랑은 행복한 것인가? 살아서 연인의 변심을 보기보다는 죽어서 영원한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일까? 사랑을 열정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번민했던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역경과 고통을 겪더라도 살아서 그 사랑을 구현하고 싶어 할 것이다. 사랑은 너무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이기 때문이다. 비틀스의 멤버로 오노 요코라는 일본계 미국인 여성을 사랑했던 존 레넌(John Lenon)은 그의 노래 ‘사랑’(Love)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사랑은 실재하는 것...
사랑은 느끼는 것...
사랑은 접촉...
사랑은 다가가는 것...
사랑은 자유로운 것,,,
사랑은 살아있는 것... “
사랑은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가면서 함께 많은 것을 느끼고, 접촉하고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다가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로워야 한다. 구속하고 집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자유로운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다. 너무도 젊은 두 남녀, 로미오와 줄리엣, 그들은 살아서 서로를 만지고 느끼고 하나가 되지 못한 불행한 연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모든 악의, 적대감, 편견의 희생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숭고한 것이기도 했다. 이태리의 시인 단테(Dante)는 평생 두 번 밖에 보지 못한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작품 ‘신곡’(Divine Comedy)에서 천국을 안내하는 인물로 설정해 문학 속에 영원히 살아있게 했다. 이런 우스개가 있다. 의사와 역사가와 작가가 한 여인을 동시에 사랑했다. 연적이었던 세 사람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의 사 : 난 내가 의사가 된 것이 너무도 다행스럽소. 당신들의 헛된 사랑에
그녀가 병들면 내가 치료해 줄 수 있으니까.
역사가 : 나도 마찬가지요. 당신의 그 서툰 의술에 그녀가 죽으면 나는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그녀의 이름을 기록할 겁니다.
작 가 : 나는 이렇게 할 수 있어요. 그녀를 나의 작품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말입니다.
단테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 베아트리체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게 했다. 그것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축복의 특권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두 남녀도 그랬다. 셰익스피어는 비록 허구 속의 인물이지만 두 연인을 영원한 사랑의 표상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몬태규와 캐풀렛 가문은 오랜 세월 원수로 살아왔다. 두 가문의 사람들은 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다. 어느 날 줄리엣의 집에서 무도회가 열린다. 로미오는 가면을 쓰고 그 무도회에 몰래 들어가 우연히 줄리엣과 함께 춤을 춘다. 두 사람은 만나는 순간 서로에게 강력히 끌리게 된다.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되고서도 그 감정의 여진은 계속된다. 사랑은 그렇게 한 순간에 오고, 운명의 연인들은 그렇듯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가 보다. 1968년에 제작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배우 올리비아 하세의 청순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지만 그 테마 음악의 선율과 가사로도 영화팬들의 마음에 남아있다. 주제곡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청년이란 무엇인가? What is a youth?
충동적인 열정 Impetuous fire.
처녀는 무엇인가? What is a maid?
얼음 같은 욕망 Ice and desire.
세상은 그런 것 The world wags on.
장미꽃은 피어나고 A rose will bloom,
또 시들어 가니 it then will fade
청년도 그렇고 So is a youth,
처녀도 그렇다네.‘ So is a maid.
로미오의 충동적인 열정, 줄리엣의 얼음 같은 욕망. 그 두 젊음이 만나 사랑은 불길처럼 일어난다. 하지만 그 열정적인 두 연인은 장미꽃이 시들 듯 그렇게 시들어버릴 운명이었다. 로미오는 무도회의 그날 밤,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줄리엣의 방 창문 아래로 달려간다. 줄리엣도 사랑의 운명을 예감한 듯 로미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렇게 유명한 발코니 장면이 연출된다.
“로미오, 아버지의 이름을 버리고
당신의 이름을 거부하세요!
그렇게 못하시겠다면, 다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그러면 나는 캐풀렛이라는 성을
버리겠어요. “ (줄리엣, 2막 2장)
사랑에 빠진 줄리엣은 타고난 운명을 거부하며 로미오의 사랑을 갈망한다. 줄리엣의 다음 대사는 사랑의 문제를 넘어 본질과 실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 아, 어떤 다른 이름이 되세요.
이름 속에 뭐가 있다는 거죠?
장미꽃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향기는 역시 마찬가지죠. “ (줄리엣, 2막 2장)
오늘날 우리는 겉으로 표현되는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허위의 가면을 쓰고 있는가. 남들이 기대하는 나의 모습을 위해 얼마나 가식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가. 이름 따위가 무엇이냐는 줄리엣의 말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날 지키기 위해 희생된 본질적인 나. 이 허위의 시대에 우리는 겉으로 불리는 이름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게 본래의 나를 찾고 정직한 자아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위적 제도에 순응하는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름을 위해서 향기를 희생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줄리엣은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던져진 사랑의 전령사이다. 사랑이라는 향기를 지키기 위해 오랜 가문의 이름을 초월한다. 로미오에게 이름을 버리라고 말한 뒤 그럴 수 없으면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만 해달라고 한다. 그러면 자신의 성을 버리겠다고. 셰익스피어는 줄리엣을 통해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는 사랑의 힘, 사랑의 불변성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로미오의 대답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대로 당신을 갖겠소. 나를 사랑한다고만 말해 주면,
새로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이제부터 로미오란 이름을 영영 버리겠소. “
(로미오, 2막 2장)
그렇게 두 사람은 다이몬적 운명이 이끄는 대로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 결혼식을 주재한 신부는 이 두 원수 가문의 아들과 딸이 그 오랜 적대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도 두 사람의 무모한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충고한다.
“격렬한 기쁨은 격렬하게 끝나며, 불과 화약이 서로 닿자마자 폭발하듯이
승리의 절정 속에서 죽는 법. 지나치게 단 꿀은 달기 때문에 도리어
싫어지며, 맛을 보면 입맛도 망치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적당히
해야 한다. 생명이 긴 사랑은 다 그런 법이다. 서두르면 살펴 가는 것보다
오히려 더딘 법이지. “ (신부, 2막 6장)
서두른 탓이었을까? 두 사람의 결혼은 또다시 운명의 시험에 들고 만다. 결혼식을 올린 후 두 사람은 그날 밤 함께 베로나를 떠나 사랑의 도피를 약속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던 로미오가 캐풀렛 가의 일행을 마주치게 되고 말다툼 끝에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실수로 로미오의 칼에 줄리엣의 사촌이 죽는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그 일로 로미오는 베로나에서 추방된다. 이제 갓 결혼식을 올린 신랑과 신부는 그렇게 이별을 한다. 만토바로 추방당한 로미오는 애타는 마음으로 신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신부는 그들을 돕기 위해 줄리엣에게 죽은 듯 잠자는 약을 먹게 한다. 서둘러 줄리엣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려던 캐풀렛 집안에서는 결혼식 준비가 장례식 준비로 변하고 만다. 신부는 자신이 줄리엣과 꾸민 계획을 로미오에게 전하려 하지만 일이 틀어지고 로미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줄리엣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법을 어기고 베로나로 돌아온 로미오는 줄리엣의 시신이 있는 캐풀렛 가의 무덤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차가운 시신으로 변한 줄리엣을 끌어안고 오열한다. 절망한 로미오는 준비해온 독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줄리엣을 바라보며 절규하는 로미오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 내 사랑, 내 아내여! 당신의 꿀같이 단 호흡을 다 빨아 마신 죽음의
신도 당신의 아름다움만은 아직도 정복하지 못했소. 두 입술과 볼에는
아름다움의 깃발이 아직도 빨갛게 나부끼고 있으니, 죽음의 창백한 깃발이
거기에 못 미치고 있구려.
................
눈아, 마지막으로 봐라! 팔아, 마지막 포옹이다! 오, 그리고 생명의 문인
입술아, 정당한 키스로 도장을 찍어서, 만물을 독점하는 죽음과 영구한
계약을 맺어라! 자, 쓰디쓴 지도자, 냄새 흉한 안내자여, 지각없는 뱃사공아,
바다에 지친 너의 배를 당장 암석에 부딪혀 다오!
이건 애인을 위한 건배다! “ (독약을 마신다.) (로미오, 5막 3장)
독약을 마신 로미오는 차가운 줄리엣의 입술에 마지막 키스를 한 후 그녀의 시신 옆에 쓰러진다. 잠시 후 걱정이 되어 무덤을 찾아온 신부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그리고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난 줄리엣을 보고 어서 무덤을 나가자고 재촉한다. 그러나 줄리엣은 로미오를 기다려야 한다며 무덤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옆에 쓰러진 로미오를 발견한다. 겨우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절규한다. 그리고 로미오의 단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그렇게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젊은 연인의 사랑은 이승에서의 종말을 고한다.
“이게 뭐지? 잔이 로미오 님의 손에 꼭 쥐어져 있네. 독약을 마시고
방금 돌아가신 거야. 무정도 하셔라! 다 마시고, 한 방울도 남겨 놓지
않으셨단 말인가? 그럼, 당신 입술에 키스할래요. 혹 독약이 입술에
아직 묻어 있다면 생명의 묘약같이 날 천당으로 보내 주겠지. (키스한다.)
아! 아직도 입술은 따뜻하네.
..............
(로미오의 단도를 잡아 뺀다.) 이 가슴이 네 칼집, (자기 가슴을 찌른다.)
여기 꽂혀서 날 죽게 해 다오. (로미오의 시체 위에 쓰러져 죽는다.)
(줄리엣, 5막 3장)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 라스트 신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이 두 연인의 사랑을 왜 이렇게 황당한 죽음으로 끝맺고 있는가. 그저 슬픈 사랑만을 그려내고자 했음일까? 앞서 얘기한 대로 셰익스피어는 사랑의 영속성을 간절히 원했던 작가였다. 그러나 이 세상 어떤 사랑이 끝이 없을 수 있는가. 생명의 유한성은 결국 사랑의 유한성을 가리키고 있다. 평생을 사랑했다 하더라도 사랑하던 누군가는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되고 이 세상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난다. 이후의 사랑은 마음속의 그리움이다. 그리고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애잔한 기억의 조각들이다. 그렇게 인간의 사랑도 결국은 유한한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시간 속에 살아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사랑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런 사랑의 조건을 힘들여 지켜야 한다. 다음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한 조각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옛날 중국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녀를 본 어떤 선비가 그녀의 사랑을 간절히 얻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선비의 정성에 감복한 그녀는 어느 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100일 간 매일 밤 일정한 때에 제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면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겠어요.” 선비는 그 후 매일 밤 정해진 시각에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그렇게 99일 밤을 보내고 마지막 100일째, 여인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한다. 하지만 그 마지막 밤에 선비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을 맺는다. 선비는 왜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혹시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선비는 마지막 밤을 채우고 간절히 원했던 여인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인을 포기한 것은 사랑은 결코 시험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100일간의 시험이 필요한 것인가.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교감일 뿐 충족해야 할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랑.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마크 스나이더(Mark Snyder) 교수는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마음을 지배한다.”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내 마음속 사랑의 크기가 정해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당신은 내게 완벽한 사람이에요.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마음속에 진정으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어떤 조건도 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굳건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사랑이 끝나고 사랑하는 이의 차가운 입술에 키스하는 순간 천상에서의 사랑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눈 그 차가운 키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