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예술이 되다

강릉 인문독서 아카데미 강연 원고 (1)

by 최용훈

인간의 모든 행위, 언어와 몸짓은 근본적으로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원시의 인간들은 공포와 경외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들의 일상 하나하나는 모두 생존을 위한 지식으로 축적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을 집단의 공유된 지식으로 만들기 위해 몸짓이나 언어를 통해 다른 인간들에게 전달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몸짓은 생존과 지식의 축적을 위한 소통의 수단이었다. 또한 그것은 자기 확대를 위한 소망의 표출이었다. 자연 속의 미미한 존재에 불과한 인간은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확대하길 원했고 그 바람이 원시적 몸짓 속에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 최초의 예술론이었던 ‘시학(Poetics)’을 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삶, 현실의 모방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모방론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흉내 내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위한 모방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원시적인 몸짓은 소통을 위한 모사로 그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부동하는 상상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몸짓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춤은 동작이다. 인간이 언어의 운율을 발견해 문학을 만들었듯이, 생존을 위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동작들 속에서 아름답고 처연한 움직임을 발견하고 우리는 그것을 ‘춤’이라는 예술로 승화한다. 모든 민족 고유의 춤은 그래서 그들의 신화, 그들의 역사와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결국 예술은 아름다움을 향한 추구이므로.


춤은 모든 예술의 원천이다. 그 원시적인 몸짓에 맞추어 리듬과 선율이 생겨나고, 음악은 몸의 움직임을 자극하고 그 움직임에 맞추어 새로운 비트와 음의 고저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안에 스토리를 입히고 언어와 함께 연극으로 발전한다. 고대의 도자기와 벽에 그려진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습은 춤추는 사람들이다. 9,000년 전 인도의 동굴 벽에서도 5,000년 전 이집트의 벽화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화병에서도 사람들은 춤을 춘다. 미술과 조각의 영원한 테마는 인간의 몸짓인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예술적인 본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춤을 추면서 인간은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까지도 민감한 예술의 세계로 이전한다.

몸짓이 감정을 만나 춤이 된다. 즐거움과 환희의 몸짓, 슬픔과 분노의 몸짓, 그것은 예술적 몸짓이 되어 춤으로 승화한다. 세례 요한의 목을 원했던 살로메의 춤은 헤롯 왕을 유혹하고,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요한에 대한 증오를 풀어내는 저주의 몸짓이었다. 그리고 잘린 요한의 목, 그 입술에 키스를 한다. 그렇게 감정과 결합된 몸짓은 춤이라는 예술이 된다.


고대의 연극은 신에게 바치는 제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 그 성스런 염원의 자리에서 인간의 육체는 신비로운 영혼과 교감하여 움직인다. 고대 그리스의 제의는 그것을 주재하는 제관과 도시국가에서 온 코러스들 그리고 의식에 참여한 군중들로 이루어졌다. 고대 서양의 제관이었던 테스피스(Thespis)는 인류 최초의 배우로 여겨지고 그의 몸짓은 현대의 연기술로 이어진다. 그렇게 간절한 염원의 몸짓이 하늘에 닿고 군중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채운다. 서양의 연극은 디오니소스에 대한 예찬의 의식에서 시작된다. 술의 신이자 생산의 신이었던 디오니소스. 니체의 말대로 그 이름은 인간의 감성, 욕망, 본능과 관련된다. 본능에 충실한 몸짓은 삶의 표현이었고,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재현이었다. 현실과 꿈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신, 그리고 우주에 대한 하나의 표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성과 논리, 지성을 상징했던 아폴로와 더불어 인간의 내재된 심성을 표현하는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그 제의의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소통과 염원의 수단이 몸짓과 소리이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연극은 인간의 육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춤과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언어를 사용해 구체적 스토리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춤과 구분된다. 그러나 인간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상상보다 훨씬 적다. 메라비언의 법칙에서 얘기하는 언어적 요소는 소통의 전체 과정에서 불과 7%만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성대가 내는 소리의 톤, 그리고 몸짓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앨버트 메라비언 박사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측면에서 언어적 요소보다는 비언어적 요소 특히 시각(55%), 청각(38%)적 요소에 의존하여 소통함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상대의 표정, 손짓이나 몸짓, 목소리를 통해 많은 것을 이해한다. 오히려 언어적 요소는 우리의 판단에 불확실성을 고조시킬 수 있다. 우리는 언어로써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때, 그것이 얼마나 많은 제약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지 발견한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상대에게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는 결국 우리의 몸짓뿐이다. 의사소통의 결여는 오늘의 현대인들이 부딪히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이다. 그리고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조리 연극은 몸짓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폭력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언어의 한계라는 의미에서 볼 때 춤은 연극보다 더 쉽고 정확하게 스토리를 전달한다.


음악은 필연적으로 움직임을 수반한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교향곡도, 달콤한 실내악도, 본질적으로 마음을 움직이기 이전에 육체의 반응을 먼저 이끌어낸다. 그래서 원시 부족들의 토속적인 춤을 이끌어내는 것은 강한 비트의 북소리이다. 소리와 몸짓의 가장 원초적인 결합이다. 록밴드의 헤드뱅잉, 4분의 3박자 왈츠의 스텝은 모두 이 결합의 소산이다. 우리의 몸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침묵 속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가 미셸 루트번스타인은 그녀의 남편인 생리학자 로버트 루드번스타인과 함께 쓴 ‘생각의 탄생’(Spark of Genius)에서 ‘몸으로 생각하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우리는 언어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 생각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의 무의식적인 손놀림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 생각 없이도 몸으로 반응해 공을 쳐내는 테니스 선수, 그들에게 있어서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몸의 반응은 일종의 언어이다. ‘생각의 탄생’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녀는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어 그 진동으로 음악을 듣고, 마루의 진동을 느낌으로써 춤을 보았다. 그리고 무용수의 허리를 붙들고, 솟아오르는 ‘도약’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헬렌 켈러는 그녀만의 생각의 도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몸의 움직임은 인간의 마음속 상상의 세계와 연결된다. 자신이 원하는 그 불가능한 욕망의 세계가 현실 속에서 간절한 움직임으로 충족된다. 그래서 잘 짜진 춤의 무대는 끝없이 우리의 상상을 자극한다. 날갯짓 하나로 하늘을 날고, 몇 바퀴의 회전으로 우리는 저 먼 미지의 세계로 이동한다. 춤은 추는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뒤흔들어 인간의 세계를 신의 세계로, 동식물의 세계로 그리고 생명이 없는 광물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렇게 몸짓은 모든 것을 표현하고, 창조하고 파괴한다.


춤은 가장 직접적인 언어이다. 원혼을 달래는 처연한 후회와 통곡의 몸짓 살풀이, 종교적인 듯, 세속적인 듯 가벼우면서도 간절한 바람의 몸짓 승무, 미친 듯이 몸을 털어내어 사자를 표현하는 사자춤, 각양 한 신분과 감정을 표출하는 가면을 쓰고 갖은 몸짓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았던 가면무, 탈춤. 그 모든 것이 언어였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감이었다. 동네 빈터에서 벌어지는 서커스 같았던 무수한 몸짓들, 거지들의 각설이 타령과 거지 춤도 이제 현대의 풍요로움과 복잡한 일상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것이 그려냈던 과거의 삶과 애환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춤은 자유이다. 억눌린 감정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몸짓으로 나타난다. 미국 소설가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소설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은 자유를 향한 끝없는 몸짓, 하늘을 향한 비행의 이야기이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톤은 먹이를 찾기 위한 갈매기의 낮은 비행을 거부한다. 그는 비행을 위한 비행, 더 높고 아름다움을 위한 비행을 갈망한다. 무리의 비난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만의 몸짓으로 아름다운 비행을 계속한다. 그렇게 몸짓은 자유를 추구한다. 1992년에 제작된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에는 수류탄 사고로 시력을 잃고, 퇴역한 슬레이드 중령(알 파치노)이 등장한다. 그는 암흑 속에서 더 이상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는 한 고등학생을 데리고 뉴욕으로 간다.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후 삶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한 레스토랑에서 그는 옆 자리에 앉은 여성의 비누냄새를 느낀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다가 흘러나오는 탱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신청한다. 여성은 망설임 속에서 그의 청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탱고를 춘다. 슬레이드 중령은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탱고의 몸짓으로 멋지게 여인을 리드한다. 그의 얼굴에 비치는 그 진지함과 함께 느껴지는 감정은 자유였다. 암흑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 자유로운 몸짓, 그것이 춤이었던 것이다.

춤추는 무용수의 손끝을 보라. 그 간절한 교감의 손 짓. 그렇게 춤은 나와 당신의 교감, 나와 신, 나와 자연, 나와 내 속의 나를 만나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춤으로 신에게 기도하였다. 사랑을 빌고, 가뭄을 뚫고 내리는 단비를 빌고, 신의 형벌에서 벗어나고자 기도한다. 그리고 끝없는 자연과의 만남들... 거대한 평원에서, 계곡에서 우리는 한 점 작은 티끌처럼 바람에 날리며 춤을 춘다. 강가의 작은 조약돌, 들판에 핀 이름 모를 한 송이 들꽃, 줄지어 나무 위를 오르는 개미들... 무수한 자연의 미물들이 우리의 몸짓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과 만나고 교감한다.


우리의 몸짓은 결국 자연의 모습이다. 밀려오는 파도의 움직임, 하늘로 향한 나뭇가지의 모습,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 자연의 모든 것들이 춤을 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이끌려 몸짓을 한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을 닮아간다.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당신과 나. 그 오랜 시간 알아왔던 삶의 궤적을 함께 돌아보며, 젊음에는 활력으로 노년에는 애틋함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때론 미워하고 웃고, 울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몸짓으로 표정으로 가슴으로 춤을 춘다. 그것은 언어이고, 감정이고, 생각이 된다. 내 속의 나를 위로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증오하는 모든 나의 몸짓들은 그대로 춤이 되어 날아오른다. 예술이 된 춤은 그렇게 우리를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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