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댄서, 이사도라 던컨 ​자연, 춤의 근원

강릉 인문독서 아카데미 강연 원고(3)

by 최용훈

“나는 바다에서 태어났고, 나는 아프로디테의 별 아래서 태어났다. 내가 아는 건 춤뿐이다.

춤은 나의 운명이었다.”


이사도라 던컨(1877~1927, Isadora Duncan)은 1877년 5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은행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을 겪으면서 그녀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성장한다. 생계를 위해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던 그녀는 특별한 무용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독학으로 춤의 동작들을 익혀왔다.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난 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의 해변으로 나가 파도의 움직임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연과 일치되는 자신의 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 미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뉴욕에서 잠시 극단 생활을 하던 그녀는 1899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런던으로 이주한다.


런던에서 그녀는 자신의 무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류층의 저택에서 공연하면서 그녀는 재정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의 스튜디오를 세우고 춤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런던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그 안에서 숨 쉬는 예술의 향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특히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그리스의 화병과 조각에서 인간의 몸짓에 대한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독특한 춤의 세계를 구축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녀의 춤은 런던의 상류 인사들에게 새롭고 파격적인 아름다움으로 서서히 각인되어 갔고 그녀의 명성은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간다. 1900년 던컨은 파리에서 위대한 조각가 로댕을 만난다. 그리고 그의 조각을 통해 인체의 신비로움과 그것을 이용한 춤이라는 몸짓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에도 로댕과의 만남은 계속되었고 그는 던컨을 ‘영혼의 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무용과 조각이라는 두 장르의 예술이 서로에 대한 존경으로 함께하는 역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리는 그녀의 삶에 가장 큰 슬픔의 장소이기도 했다. 1913년 센 강가에서 그녀는 교통사고로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던컨이 베를린의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녀보다 16살 연상의 미국의 발레리나 로이 풀러 때문이었다. 그녀는 유럽에 진출한 최초의 미국 발레리나였다. 던컨은 그녀를 존경했다. 사실적인 무대 표현으로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냈던 그녀의 제안으로 던컨은 그토록 존경했던 니체와 바그너의 나라에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던컨이 최초로 그녀의 무용학교를 베를린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발레의 전통을 갖지 못했던 독일이 그녀의 춤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활발한 공연을 펼친다. 전통적인 발레의 경직성을 벗어난 그녀의 자연스러운 동작은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근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던컨의 독특한 스타일은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던컨은 유럽뿐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오랜 발레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에서도 기존의 무용 형식에서 벗어난 새롭고 혁신적인 무용에 대한 영감이 필요했던 때문이었다.


던컨의 춤에 대한 철학은 프랑스의 미학자 프랑소와 델사르트(Francois Delsarte)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델하르트는 파리음악원에서 연기와 노래를 배웠지만 배우로서의 삶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자신만의 미학적 개념을 확립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많은 감정적, 실제적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고, 행동하고, 반응하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일정한 표현의 패턴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목소리, 호흡, 동작의 역동성, 그리고 인간의 육체로 가능한 모든 표현의 방법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이론은 던컨의 춤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몸짓과 표정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의 몸이 자연과 합치되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녀의 춤에 담고자 하였던 것이다. 던컨이 토우 슈즈를 벗고 맨발로 무대에 선 것이나, 전통적인 발레복이 아닌 그리스풍의 튜닉을 걸치고 거의 반라의 모습으로 춤을 춘 것 역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움직임에 대한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난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던컨은 상업적인 공연에 대해 적지 않은 혐오감을 지녔고, 그런 이유로 장기적인 순회공연의 계약을 기피하기도 하였다. 그 대신 그녀는 무용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04년 베를린에 첫 무용학교를 열게 되는데 이때 여섯 제자들을 특히 아껴서 1919년 던컨은 이들 모두를 자신의 자식으로 입양한다. 이 여섯 여성 제자들은 ‘이사도러블스(Isadorables); 이사도라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한다. 1914년 파리에서도 무용 학교를 설립하지만 일차 대전의 발발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던컨은 조국인 미국으로 옮겨간다. 뉴욕에 정착한 그녀는 뛰어난 발레리나로서 대접을 받는다. 주택과 스튜디오뿐 아니라 그녀의 공연만을 위한 전용극장까지 제공받는다. 전쟁이 끝난 뒤 던컨은 다시 유럽 활동을 재개하고 1921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무용 학교를 세우게 되는데, 재정적인 후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여섯 제자 중의 하나인 이르마에게 맡기고 유럽으로 귀환한다. 흔히 던컨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회자된다. 1922-23년 사이의 미국 순회공연 중 그녀가 무대 위에서 가슴을 드러낸 채 붉은색 스카프를 흔들며 “이건 빨간색이에요. 내가 그렇죠.”라고 소리친 데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그녀가 사상에 경도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차라리 그녀는 푸시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나라, 차이코프스키와 스트라빈스키, 라흐마니노프의 나라를 사랑했다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던컨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한 자의식과 무용에 대한 고집스러우리만치 강한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의 결혼, 끊이지 않던 남성 편력, 양성애자로서 여배우와의 스캔들... 세 번째 남편이었던 18세 연하의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은 그녀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른 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술과 담배, 방탕한 삶 때문에 던컨은 간혹 가십 같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녀가 당대 영국의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저명인사였던 조지 버나드 쇼에게 구혼한 얘기는 유명하다. 던컨은 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선생님과 제가 결혼해서, 나의 육체와 선생님의 머리를 가지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얘기를 들은 쇼의 대답은 웃음을 자아낸다. “당신의 머리와 나의 육체를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건 재앙이지.”


1920년대 후반 공연의 쇠퇴로 던컨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다. 스캔들과 지나친 음주로 그녀는 무용가로서의 능력을 서서히 잃어간다. 파리와 지중해 지역을 오가며 생활했던 그녀가 당시 묶고 있던 호텔비를 연체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그녀는 위대한 발레리나의 자서전을 기대하던 몇몇 사람들이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1927년 9월 14일, 프랑스의 니스 해변에서 그녀는 새로 사귄 젊은 이태리 애인의 스포츠카에 동승한다. 목에는 친구에게 선물 받은 2미터나 되는 긴 붉은색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는 순간 그 스카프가 차의 뒷바퀴에 감기면서 그녀는 순간적으로 질식하고 만다. 그렇듯 허무하게 숨을 거둔다. 그녀는 파리의 한 묘지에 묻힌다. 그리고 그해 시카고 트리뷴지는 그녀의 자서전 ‘나의 인생’(My Life)을 출간한다.

조국인 미국이 그녀의 춤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시기는 1970년대 후반이었다. 그녀가 춤을 추던 20세기 초반에는 그녀의 춤이 보여주던 예언적인 춤의 철학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 무용의 어머니’라고 불리던 던컨의 삶은 방황 속에 끝이 났지만 그녀가 무대 위에서 재현했던 자연의 모습과 그 자유로운 몸짓은 오늘의 무용 속에 여전히 살아남아 움직이고 있다. 던컨은 이렇게 말한다. “춤은 개인에게 집중된 우주의 움직임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우주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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