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사강, 슬픔과 이별한 일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by 최용훈

그녀의 이름, 그녀의 작품 제목은 늘 고독, 방황, 냉소, 아픈 쾌락을 떠올린다. 도박과 음주, 지독한 흡연과 함께 살았던 그녀의 주름진 말년.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세상의 많은 독자들에게 열아홉 살의 나이로 ‘슬픔이여 안녕,’ 스물 하나에 ‘어떤 미소’를 써내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프랑스의 소녀 작가로 기억되고 있을지 모른다. 프랑수아즈 사강. 그녀는 그 작품들로 너무도 어린 나이에 너무도 뜨거운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다는 치기 어린 확신에 함몰되었을지 모른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중학교를 다니다 퇴학을 당하고, 카페를 드나들며 담배와 위스키를 즐기고, 재즈에 빠졌던 소녀. 어머니의 표현처럼 그녀는 파리의 뒷골목을 방황하던 ‘들개’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소르본느에 입학한 지 일 년 만에 대학을 그만두고 그녀는 내면에 들끓었던 일탈의 미학을 글로 옮기기 시작한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등장인물 ‘사강’을 필명으로 사용했던 그녀의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

어린 시절 그녀는 자크 프레베르의 시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의 낭만적 감성과 비판적 시각이 그녀의 혼돈스러운 정신세계를 설명할 작은 단초를 제공하고 있으니까. 프레베르의 시 ‘성냥개비의 사랑’은 사강이 스물넷의 나이에 쓴 ‘브람스를 아시나요?’에서 묘사한 여인의 미묘한 감정, 그녀의 기대와 닮아있다.


조용히 어둠이 내리는데

성냥개비 세 개를

하나씩 하나씩

켜본다.

하나는 당신의 얼굴을 비추기 위해

다른 하나는

당신의 눈을 보기 위해

마지막 하나는

당신의 입술을...

그 뒤엔

어둠 속에서

당신을 포옹하며

그 모든 것을 생각한다.


그녀는 이 낭만적 감각을 여성의 시각에서 가장 여성적으로 그려낸 작가였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어린 시절 그녀가 냉소적으로 읊조리던 프레베르의 또 다른 시를 연상시킨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그대로 그곳에 계속 계시옵소서. 저희는 이 땅 위에 그대로 있겠습니다. 이곳은 때로 이렇듯 아름다우니... “

사강, 그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이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었다.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나는 인생을 즐겼다. 그렇게 오랫동안 인생을 즐겼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두 번의 이혼, 도박으로 인한 파산, 스피드 광, 교통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 흡연과 음주 그리고 마약. 말년의 그녀는 탈세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곤궁함을 겪는다.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비디오카세트를 하나 사고 싶지만 내게는 그 돈이 없다.” 하루 저녁에 수억 원에 달하는 인세를 카지노에서 날리고도 “돈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태연했던 그녀. 마약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의 삶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아들에게는 죄책감을 느꼈던 것일까? 자신을 비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들뿐이라고 고백했으니까.

1954년에 ‘슬픔이여 안녕‘을 출간했을 때, 이 188쪽에 불과한 짧은 소설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세 소녀가 그려낸 거침없는 연애와 애정 행각은 그녀를 하루아침에 독자들의 관심권으로 끌어들였다. 22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50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이 소설로 그녀는 ‘매혹적인 작은 악마’ ‘명석한 잔혹함’을 지닌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어떤 미소’(1956), ‘한 달 후, 일 년 후’(1957), ‘브람스를 좋아하세요?’(1959)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을 감싸고 있던 암울함, 프랑스 사회에 만연된 억압과 금기의 분위기 속에서 사강의 작품 속에 표출된 자유분방함과 방탕의 분위기는 많은 젊은 독자들의 환호를 끌어내기 충분했다.

사강이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뉴스가 전해진 것은 ‘한 달 후, 일 년 후’가 출간된 1957년이었다. 첫 번째 소설의 인세로 멋진 재규어 차를 구입하고 스피드를 즐기던 그녀의 삶에 첫 시련이었다. 치명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3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소생한다. 이후 그녀의 삶은 작품의 성공에 비례해 피폐해 간다. 스무 살 연상의 남자와 2년간의 결혼생활과 이혼, 두 번째 남편과의 결혼, 이혼, 동거... "결혼이란 아스파라거스에 비니그레트 소스냐 네덜란드식 소스냐를 곁들이는 취향의 문제"라고 말했던 그녀는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을 갈구한 사랑의 방황을 겪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강의 무절제한 삶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소설 속의 삶에 다름 아니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도박 속에서 ‘정신적 정열’을 발견한 그녀는 프랑스 카지노에서 악명을 얻게 되고 5년 간 도박장 출입이 금지되자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도박 원정을 떠나기도 하였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창조한 그녀의 세계 속에 자신을 함몰시킨 고립감과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너무 이른 성공과 세간의 관심, 그리고 본능적인 자유분방함. 그렇게 사강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도니뿐이었다. 마약, 술, 도박, 무분별한 남성 편력으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던 그녀가 생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창작을 계속할 수 있었던 원천이기도 했다. 그녀는 ‘신기한 구름’ ‘마음의 파수꾼’ ‘찬 물속 한 줄기 햇빛’ ‘화장한 여자’ ‘핑계’ ‘지나가는 슬픔’을 포함해 20여 편의 소설, ‘스웨덴의 성’ 등 8 편의 희곡과 시나리오, 그리고 몇 편의 자서전 등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에 비해 적지 않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빚을 갚기 위한 저술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녀의 소설 중 상당수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많은 판권과 인세에도 불구하고 사강이 겪은 재정적 어려움은 그녀의 삶이 얼마나 방탕하고 피폐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사강의 소설은 길지 않았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중편 정도의 길이에 불과했다. 또한 그녀의 소설은 심각하지 않았다. 그 자유분방함만큼이나 소설 속의 삶은 진지하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이 주는 그 가벼움은 20세기 중반, 전쟁 이후 유럽의 사상적, 철학적 무거움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글을 독자들에게 제공하였다. 실존주의 철학과 연계된 인간 존재의 문제, 부조리한 세계를 그려내던 철학적 문학의 범람 속에서 그녀의 소설은 하나의 청량제였다. 문학이 그려내던 ‘무거움’에 대한 염증이 일상의 권태로움에 대한 그녀의 경쾌하고 자유로운 글이 만들어낸 카타르시스로 대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강의 자전적 기억의 단편을 모은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에는 위대한 흑인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와의 만남, 동성연애자로 비난의 시선을 받았던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와의 공연, 천재 영화감독 오손 웰스와의 추억, 말년에 시력을 잃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한 깊은 사랑 등이 묘사되고 있다. 이 자서전에서 사강은 “시간과 사랑을 붙잡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하듯이, 태양도 인생도 붙잡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것이 그녀의 깨달음이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삶과 사랑과 사라진 시간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번잡하고 시끄러웠던 그녀의 삶이 얼마나 큰 고독 속에 갇힌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다음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중의 한 구절이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고독형을 선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강의 삶은 종종 현대 무용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이사도라 던컨의 삶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것은 두 여인이 모두 끝없이 자유로움을 추구했지만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의 삶, 그 성에 갇혀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4년 9월 24일, 사강은 노르망디에 있는 한 병원에서 심장병과 폐혈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죽음에 대해 그녀의 열렬한 애독자였던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는 가장 훌륭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 중 한 사람을 잃었다”며 애도했다. 그렇게 스스로 선고한 ‘고독형’의 형기를 마치고 그녀는 슬픔과 이별하기로 결심한 19세의 발칙한 소녀 작가로 돌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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