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쉽게 읽기-근대 철학자들
홉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라이프니츠, 흄, 루소, 칸트, 헤겔
서양철학은 다음의 네 가지 시기를 거쳐 왔다.
고대철학 : 서양의 고대철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이 시기에 이미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제기되고 광범위하게 논의 되었다.
중세철학 : 중세철학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철학이 기독교 신학과 결합된 것이었다.
근대철학 : 근대철학은 중세의 신학적 철학에서 벗어나 이성(理性, reason)에 집중했던 철학이다.
현대철학 :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 현대철학에서는 근대철학의 중심적인 작업의 계속 혹은 반동(反動)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철학이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믿음의 체계를 지닌 사람들이 어떻게 평화와 조화 속에 살 수 있는가. 보편적 진리의 근본적인 원천은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서양 철학의 네 시기는 각기 특유의 주제와 접근방식을 지니고 있지만 유사성 또한 적지 않았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철학’(philosophy)은 존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근대철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 유럽에 살았던 철학자들의 작업을 일컫는다. 이들의 특이점은 그들 모두 다른 무엇보다도 ‘이성’(reason)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믿음과 판단에 이르는 과정을 ‘이성’이라 하는데 근대 철학자들은 그것이 교리적인 종교 즉 기독교가 그 권위를 잃어가는 시대에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에 새로운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로써 그들은 이성의 진정한 본질과 그것이 인간과 인간 행동의 다양한 영역에 얼마만큼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탐색하였다.
근대철학자들의 범주는 지극히 광범위하지만 그 가운데 몇몇 대표주자들은 근대철학의 발전에 뿐만 아니라 현대철학에도 중요성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다음에 대표적인 근대철학자들을 소개한다.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1588~1679)
정치철학의 대가로 꼽히는 홉스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상가였다. 철학에 있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생각에 반하여 광범위한 유물론, 유명론(唯名論), 경험론적 견해들을 옹호하였다. 물리학에서는 라이프니츠에게 영향을 끼쳤고, 역사학에서는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잉글랜드의 내전(청교도 혁명, 1642~1651)을 다룬 ‘장기 의회’(Behemoth or The Long Parliament)라는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수학 분야에서의 성공은 미약하였지만 그는 원과 동일한 넓이의 정방형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계속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홉스는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과 정부 구성의 원리를 사회계약론 위에 세운 최초의 근대 정치 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홉스의 대표적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그는 '국가'를 인간이 만든 '신적 존재'로 규정하고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절대적 힘을 가진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하고 있다.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근대철학의 창립자로 알려진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에서 ‘cogn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긴다. 이것은 형이상학과 신학으로부터 인식론(epistemology)과 관련된 철학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는 입증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로 지식의 문제에 접근하였고, 그럼으로써 전적으로 이성에 기초한 지식체계의 공고한 기반을 세우려했던 것이다.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
스피노자는 초기 근대철학에 파격적인 영향을 끼친 철학자였다. 그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여러 원리들을 고대의 스토아철학, 홉스, 중세의 유대교 합리주의와 결합해 독창적인 철학체계를 세웠다. 신과 세상, 인간과 지식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열정의 통제를 통해 미덕과 행복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도덕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또한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주창하고, 성경과 분파적인 종교의 허식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윤리학’(Ethics)에서는 철학에 유클리드 기하학의 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존 로크 (John Locke, 1632~1704)
영국의 철학자 로크는 의학 분야의 연구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인간 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89)에서 근대의 경험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으며 광범위한 주제들에 대한 인간 지성의 한계를 규정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인간이 합리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한 로크는 샤프츠베리 초대 백작이었던 애쉴리 쿠퍼(Ashley Cooper)와 밀접한 친교를 이루어 무역과 식민지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공직을 여러 차례 수행했으며, 경제문제에 대한 저술가, 왕정에 반대하는 정치 운동가 그리고 마침내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을 이루는데 역할을 한 혁명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통치론’(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말하며 자연권과 사회계약에 관련해 합법적인 통치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는 또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창하였으며 그의 저술들은 근본적으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에 대한 저항이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Leibniz, 1646~1716)
천재로 널리 칭송되었던 라이프니츠는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수학자였고 여러 학문 특히 논리학 분야에 커다란 족적을 남겨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논리학자로 여겨지고 있다. 철학적으로는 형이상학적 이상주의(idealism)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의 이론에 따르면 ‘실체는 정신적이고 상호작용 하지 않는 ‘단자(單子, monad)’ (넓이나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 라이프니츠의 용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고, 종종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우리는 있을 수 있는 세상들 가운데 최고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이론이나 가설들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사실 라이프니츠는 경험 물리학이나 법학 등 구체적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1776)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se on Human Nature)에서 흄은 회의론(scepticism)의 입장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데카르트와는 많은 철학적 결론에서 충돌하였다. 경험론(empiricism)의 주창자로서 흄은 감각에서 유래된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만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인과관계’는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합리적으로 입증될 수 없으며 단지 두 사건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정신적인 연결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장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스위스 태생의 철학자이자 작가, 정치이론가였던 루소는 자신의 철학적 글과 소설들로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여러 면에서 18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유럽 계몽주의(이성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그는 정치적 윤리적 사고들을 새로운 영역으로 전환해 음악과 예술에 대한 취향을 혁신시켰으며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는 부모들에게 자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 즉 교우관계나 애정에 있어 공손한 자제보다는 감정의 표현을 강조했던 것이다. 또한 종교적 교리를 무시하는 당대의 경향 가운데에서 종교적 예찬의 의식을 도입하였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했으며 자유를 열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근대철학의 핵심적 인물인 칸트는 초기 근대철학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통합하여 19세기와 20세기 철학의 근간을 세웠으며 오늘날의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정치철학, 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칸트의 비판철학(순수이성비판, Critique of Pure Reason, 1781, 1787; 실천이성비판,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1788: 판단력비판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ment, 1790)의 근본적인 명제는 인간의 ‘자율성’(autonomy)이었다. 그는 인간의 지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을 구성하는 자연의 일반적인 법칙의 원천이며, 인간의 이성은 신에 대한 믿음, 자유, 불멸성의 기초가 되는 도덕적 법칙을 스스로 획득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고로 과학적 지식, 도덕과 종교적 믿음은 모두 동일한 인간의 자율성에 입각함으로써 상호간에 지속적이고 안정적이 된다는 것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G. Fichte),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F.W.J. von Schelling)과 더불어 헤겔은 칸트 이후 수십 년 간 지속된 독일 이상주의의 시기에 활동하였다. 헤겔은 자신의 저술과 강연을 통해 논리적인 출발점에서 자신의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철학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언급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이후 마르크스(Karl Marx)에게 이어지고 공산주의로 정점에 이르는 역사발전의 유물론으로 전환되었다. 독일의 이상주의 철학운동은 헤겔의 죽음과 더불어 종식되었다. 20세기 후반 논리적 사고의 혁신이 일어난 후 헤겔 철학의 논리는 대체적으로 잊혀 왔지만 그의 정치적, 사회적 철학과 신학적 관점은 오늘날까지도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1970년대 이래 헤겔의 체계적 사상과 논리적 기초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 18세기 후반 칸트는 합리주의(rationalism)와 경험주의를 결합하는 획기적인 철학 체계를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철학적 논쟁을 끝내는 데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19세기 초반 독일 내에서 독일식 이상주의(idealism) 철학으로 시작되는 엄청난 철학적 열정에 불을 지폈다. 이상주의의 특징적 주제는 세상과 정신은 같은 범주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헤겔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는데, 그는 자신의 ‘법철학 강요(綱要)’(Elements of the Philosophy of Right)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실재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실재한다.”